지역 최초 제작 영화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 한국전쟁 중 '여인애사' 등 제작…'반짝' 전성기
최초 여성감독 박남옥·이창동·김기덕·봉준호 등 유명 지역 영화사 연구 등 신속히 이루어져야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차지한 영화 ‘기생충’ 봉준호 감독이 귀국한 16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이 취재진과 시민들로 붐비고 있다.연합

서성희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51·여)는 대구경북 영화사를 연구한 1명으로 꼽힌다.

동국대에서 영화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영화평론가를 비롯해 대구경북영화영상협동조합 이사장, 대구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 대구영상미디어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만 자신을 대표 연구자로 꼽는데 손사래를 쳤다.

지금까지 자신은 물론, 대구경북 근현대 영화사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 대표는 한국전쟁 중 대구경북이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확실한 연구에 대한 갈증이 남아있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대구경북 영화사를 들어봤다.
 

2019년 11월 8일 오후 강원 강릉아트센터에서 열린 ‘제1회 강릉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이창동 감독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연합

△1903년대, 서울 다음으로 많은 영화관을 가진 대구경북.

지역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대구 녹성키네마 제1회 작품인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이다.

1930년 11월에 개봉했으며 지역의 영화제작사가 최초로 만든 작품으로 의미를 더했다. 포항 등 동해안 일대에서 2개월 동안 촬영이 이뤄졌다.

대구영화촬영소에서 제작한 ‘종로’도 1933년 관객들을 만났으며 1년 뒤 ‘칠번통소사건’도 같은 제작사에서 만들었다.

대구 최초의 극장은 1910년대 중반 대구좌로 옥내 극장이었다.

영화상설관은 1920년 조선관으로 전당포 영업자들의 모임인 일심회와 대구좌 주인 나까무라, 조선인 배모씨 등이 조선인을 위한 극장을 개관했다.

2년 뒤 조선관 터에 대구극장이 건축됐으며 같은해 만경관이 문을 열었다.

1925년 당시 전국에 총 27개 영화관이 있었는데, 서울이 12곳으로 가장 많았으며 대구가 4곳으로 두 번째를 차지했다.

대구 출생 대표 감독으로는 이규환 감독이 꼽힌다.

1904년 태어난 이 감독은 보정보통학교와 계성중을 졸업했으며 일본과 중국에서 연출을 공부했다.

‘한약방에서 밥벌이하다’를 비롯해 28세인 1932년 ‘임자 없는 나룻배’를 선보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조선민족의 혼이 죽지 않고 빛나고 있음을 암시해 준 영화’라고 평가했으며 일본 호찌 신문도 ‘사실주의적 기법이 두드러진 가작’이라고 호평했다.

농촌청년이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미신타파에 앞장서는 ‘밝아가는 인생’(1933년)은 대구 익명의 출자자가 나서 조선교육영화사에서 만들었다.

‘바다여 말하라’(1935)는 청구키네마사에서, ‘그 후의 도령’(1936)은 대구 오양영화사에서, ‘무지개’(1936)는 대구 영남영화사에서 제작하는 등 지역을 대표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40년대는 내선일체·황국신민화, 전쟁 선전을 위한 어용영화만 제작됐다.

이 감독은 조선총독부가 요구한 ‘창공’ 제작을 끝까지 하지 않았고 평택비행장을 건설하는 강제노동에 끌려가는 고초를 겪었다.

△대구경북 영화사, 짧은 전성기.

한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한국전쟁 당시, 역설적으로 대구가 한국영화사의 중심이 됐다.

1950년에만 ‘여인애사’를 비롯해 전쟁 기록영화인 ‘흥부와 놀부’, ‘아름다웠던 서울’, ‘서부전선’ 등이 제작됐다.

‘화랑도’는 전쟁으로 촬영이 중단됐으나 대구에서 완성돼 개봉된 반공물이다.

1951년 5편, 1952년 6편 등이 대구에서 제작하거나 촬영됐다. 1954년 대부분의 영화인들 서울로 돌아가면서 짧은 전성기를 마무리했다. 전쟁 이후 지역의 출자자가 나타나면 스태프와 배우를 지역으로 불러 제작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1960년 영화법이 제정되면서 대구의 영화제작사가 끊기게 된다.

당시 정부에서 한국영화의 보호와 육성을 내걸면서 등록제·스튜디오·녹음·현상시설·조명·카메라·전속감독·전속배우, 연간 15편 이상의 제작실적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71개 영화사 자진 통합, 16개로 1차 정비가 이뤄졌다.

청구영화사는 이재명의 한국영화사에 소속됐으며 1973년 영화법이 강화 개정됨에 따라 대구는 영화제작시대에서 영화 촬영지시대로 축소됐다.

서성희 대표는 “자료가 소실될 우려가 높아 지역 영화사, 특히 근현대사 관련 연구가 빠른 시일 내 이뤄져야 한다”며 “지역 영화사, 영화 자체 발전을 위해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017년 4월 10일 별세한 한국 최초 여성 영화 감독 박남옥 선생.연합

△꾸준히 이어진 지역 출신 대표 감독들.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영화제 4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면서 지역 출신 감독들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영화법으로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지역 영화계 자체가 축소될 수밖에 없었지만 지역 출신 감독들은 꾸준히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 사랑받는 감독들도 성장했다.

대표적으로 이창동 감독이 꼽힌다.

이 감독은 1954년에 태어나 대구고와 경북대 사범대를 졸업했다.

신일고 국어 교사로 일하면서 소설가로 활동하다가 영화계에 뛰어들었으며 1996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시나리오 작가로 백상예술대상 각본상을 받았다.

1997년 ‘초록물고기’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했으며 청룡영화제 작품상, 감독상을 받는 등 영화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세 번째 작품인 ‘오아시스’가 2002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FIPRESCI상과 특별감독상을 수상, 해외에서 이름을 알렸다. 2007년 발표한 ‘밀양’은 주연배우 전도연의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으로 이어지면서 전도연을 ‘칸의 여왕’으로 만들었다.

한국 최초 여성 감독도 지역 출신이다.

1923년 하양에서 태어난 박남옥 감독은 이화여전 가정과를 중퇴한 뒤 신문사 기자를 거쳐 조선영화사촬영소 편집으로 일했다.

전쟁 중 국방부 촬영소 뉴스촬영반 활동했으며 1955년 ‘미망인’으로 한국 최초 여성감독에 이름을 올렸다.

1997년 제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1951년 태어난 배용균 감독도 지역 대표 감독으로 꼽힌다.

이창동 감독에 앞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감독했으며 1989년 칸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영화’ 부문에 선정됐다.

스위스 로카르노영화제에서도 많은 상을 받았으며 배 감독은 제작자인 동시에 감독·촬영 등을 모두 담당했다.

2017년 4월  13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展’ 개막식에 참석한 김기덕 감독.연합
2017년 4월 13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展’ 개막식에 참석한 김기덕 감독.연합

이 밖에도 홍화 출신인 김기덕 감독은 ‘피에타’로 2012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김현목 기자
김현목 기자 hmkim@kyongbuk.com

대구 구·군청, 교육청, 스포츠 등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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