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삼문 금오공과대학교 외래교수
권삼문 금오공과대학교 외래교수

김효원(金孝元·1542∼1590)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구미로 와서 사는 동안 여러 향토사, 향토문화 자료를 섭렵을 하였으나, 그가 선산 출신이란 것을 몰랐다. 그는 선산[일선] 김씨의 후예이다. 어느 날『일선지』를 보다가, 그가 그인가? 라며 혼자 놀랐다. 주변에서 아무도 말해주지 않으니, 관심이 없어서인가? 동서 분당으로 나라 망했다는 논리에 숨을 죽이는가? 아니면 집안에 어떤 사정이 있었는가? 여전히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후손의 입장에서 그를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가? 의심해 볼 뿐이다.

『일선지』에는 두 군데 그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2권「인물」편에 간략한 기사가 실려 있고, 3권「행장과 묘갈」에 상주 출신의 유현(儒賢) 창석 이준(李埈·1560~1635)이 쓴 ‘성암 김효원 언행록 약술[省庵 金公 言行錄略]’이 실려 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성암은 문과 장원급제자이다. 남명 조식, 퇴계 이황의 문인(門人 : 제자)이며, 동서 분당의 주인공이 된 사연은 알려진 바와 같다.

1575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전랑의 관직은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고 이발(李潑)을 추천했다. 즉, 훈신(勳臣)·척신들에 의한 정치 체제의 개혁을 둘러싸고 선조 즉위 직후부터 전배(前輩)와 후배(後輩)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척신 정권 때 정계에 진출해 심의겸의 도움을 받은 사림이 전배이고, 소윤의 몰락 이후 심의겸과 무관하게 정계에 진출한 부류가 후배로, 이들 후배 사림은 심의겸의 척신적 처지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대립은 이조전랑 추천과 임명을 둘러싼 대립을 계기로 점차 심화되어,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전배는 대부분 서인이 되고,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후배는 동인이 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김효원 항목 참고)

이 정도 김효원에 관한 자료를 파악하고 있던 때, 퇴계 이황의 고제 가운데 한 명인 성재 금난수(琴蘭秀·1530~1604)의『성재일기』를 보게 되었는데, 성재가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할 때 심의겸이 주관하는 한강 뱃놀이에 참석한 기사가 두어 번 나온다. 아니! 퇴계의 제자가 서인의 영수와 어울리다니! 전혀 관심이 없었던 심의겸( 沈義謙·1535~1587)의 인적 사항을 찾아보았다.

본관은 청송(靑松).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중략) 효성이 지극하고 검소하였으며, 외척으로 있으면서도 권세를 함부로 부리지 않았다.(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심의겸 항목 참고)

다시 또 놀란다. 심의겸도 퇴계의 문인이며, 후배 사림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할 때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두 사람 다 퇴계의 문인이니 사림파 내의 분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쯤에서 우리는 당쟁에 대해서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더 이상 당쟁의 주역을 공명심이 넘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적을 몰아내는 일에 앞장 선 사람으로 매도해서는 안될 것이다.

창석은 ‘언행록 약술’을 마무리 지으며, ‘슬프다! 훌륭한 재주와 덕을 지녔으나 당의(黨議)가 한번 열리니 세상이 용납하지 않았구나.’라고 하였다.

성암을 소개하는 글에는 대개 분당의 책임을 느껴, 말년의 10여 년을 자숙하며 보냈다고 기록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지만 필자의 능력 밖의 일이다. 전공분야도 아닐뿐더러, 그의 교유 사항과 그에 따른 주변인들의 문집, 오고 간 시서(詩書) 등 흔적이 있을 만한 수많은 자료를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작업이 나름의 가치는 지니겠지만 사안을 다르게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성암이 분당의 책임자임에 강한 자부심을 느꼈다면 어떨까? 이는 이후 진행된 분당의 역사에 관한 가치판단에 따라 다르다. 필자는 조선의 분당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보므로, 성암은 보다 더 훌륭한 인물이었을 것이란 믿음이 생긴다. 그의 사위는 교산((蛟山) 허균(許筠·1569~1618)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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