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윽한 눈빛을 흘리며
너는 내게로 와서 삶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해 뜨고 바람 부는 달빛

곡식을 익게 하고
그대를 저물게 한다

그 저녁 나뭇잎들은
내 뼈마디에 속삭인다

이런 서늘함 속에서 문장을 캐내는 일이
그리 쉬운 줄 아는가, 가령 예를 들자면
달빛을 챙겨서 구름 위에 얹는 일
햇빛 눈부신 날, 비의 현수막을 걸어놓거나
사랑의 높이를 열 단으로 쌓아서 / 구름다리를 놓는 일
등잔불 밑의 그리움들을 치우고
그대를 오래 잠들게 하는 일
그 저녁 늦도록 그대가 일어나지 않으면
나는 그대의 잠 속으로 걸어 들어가
물에 젖은 창문을 닫는다


<감상> ‘나’가 시인이라면, ‘그대(너)’는 저녁의 어스름이네. 그대가 내게 삶이 무엇이냐고 물어놓고는 본인이 그냥 전업(專業)의 일이라고 답을 해버리네. 저녁이 하는 일이 다름 아닌 시인의 일이었네. 어슬녘은 시인에게 문장을 캐내는 시간이고, 사랑의 높이를 쌓는 시간이고, 그리움을 오래 잠들게 하는 시간이네. 이런 일들이 어디 쉬운 일인가. 일상 속에 매몰되어 시적 감수성이 다 소진된 이 시대에 시인의 전업(前業)을 알아주기는 하는가. 하지만 저녁이 늦도록 일어나지 않으면 그 속으로 들어가 깨우는 일도 시인의 일이네. 우리에게 건전한 정신과 어슬녘에 머물도록 하는 게 시인이라네.(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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