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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광장] 1911년 봄, 대고산에서 5개항을 선포하다
[아침광장] 1911년 봄, 대고산에서 5개항을 선포하다
  •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 승인 2020년 02월 20일 18시 02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2월 21일 금요일
  • 1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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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고향을 출발한 경북지역 인사들은 신민회와 약속했던 땅, 삼원포(三源浦·지금의 길림성 통화시 유하현)와 그 인근에 정착하였다.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석 달이 걸리는 힘든 여정이었다. 이상룡 일가는 식구들이 서간도에 모이는 데만 꼬박 3개월이 걸렸다. 여정도 힘들었지만, 정착과정은 더욱 어려웠다. 생활이 어렵다고 광복을 위한 노력을 멈출 수는 없었다.

망명 지사들의 독립운동 방략은 독립전쟁론이었다. 군사를 양성하여 일본과의 전쟁을 통해 독립을 이룩하겠다는 방략이다. 이를 위한 1910년대 활동은 크게 네 가지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첫째는 동포사회의 사회·경제적 안정화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주한인들의 안정된 생활이 필요했다. 이는 생존과 직결된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었지만, 가장 어려운 과정이기도 했다.

둘째는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 자치기구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이는 안으로는 독립운동을 전개할 중요한 기반이자, 대외적으로는 자치권을 확보받을 수 있는 기구이기도 했다. 서간도 지역에서 만들어진 첫 자치조직은 경학사(耕學社)였다. 경학사는 이후 부민단(扶民團)·한족회(韓族會)로 계승되면서, 서간도지역 독립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셋째는 민족교육기관 설치와 교육활동이다. 함께 망명한 2세대와 3세대를 민족의 동량으로 키우는 것은 독립전쟁 수행에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 그 첫 학교가 1911년 삼원포 추가가에 설립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였다. 신흥강습소는 독립군을 양성할 기반이 되었고, 신흥무관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넷째는 병영(兵營) 설치와 독립전쟁 준비였다. 1910년대 한인사회의 최종 목표는 독립전쟁을 수행할 군사력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신흥학교와 같은 학교를 세우고 운영하였다. 그러나 이곳을 졸업한 청년들에게 보다 체계적인 군사훈련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백서농장(白西農庄)·마록구농장(馬鹿溝農庄)·길남장(吉南庄)과 같은 병영을 세웠다. 이는 1919년 서로군정서의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골격은 경학사 조직 당시 선언했던 5개항에 잘 드러나 있다. 1911년 봄 서간도 지역 애국지사들과 이주 한인 300여 명은 대고산에서 군중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다음 5개항이 결의되었다.

첫째, 민단적 자치기관의 성격을 띤 경학사를 조직할 것.

둘째, 전통적인 도의에 입각한 질서와 풍기를 확립할 것.

셋째, 농업을 적극 장려해 생계방도를 세울 것.

넷째, 학교를 설립해 주경야독의 신념을 고취할 것.

다섯째, 기성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해 기간장교로 삼고 애국청년을 수용해 국가의 동량 인재를 육성할 것

이날의 결의에 따라 경학사가 조직되었고, 이를 이끌어갈 사장(社長)에는 이상룡이 초대되었다. 이상룡은 ‘경학사취지서’를 발표하여 조국독립을 위해 매진해 나갈 것을 천명하였고, 그 무거운 걸음을 한발 한발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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