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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시단] 시로 쓴 농사일기19-환상통
[아침시단] 시로 쓴 농사일기19-환상통
  • 박형진
  • 승인 2020년 02월 23일 18시 22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2월 24일 월요일
  • 1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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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 않은 고추가 내 몸뚱이에는 심겼나 보다
일도 하지 않은데
허리가 왜 이렇게 아프다냐 생각해 보니
아하! 고추밭 줄을 치느라 이러는구나
손끝이 왜 이리 아프다냐 생각해 보니
아하! 고추밭 고랑에 풀을 매는구나
입안이 왜 이렇게 얼얼타냐 생각해 보니
아하! 풋고추 따서 된장에 찍었구나
덥지도 않은데 왜 이리 땀난다냐 생각해 보니
아하! 시방은 땡볕에 고추를 따는구나, 이 고추
따설랑 장마에 골리며 말리며 병든 것 버리고 포대에
담으니 서른 근! 왜 이리 허망타냐 생각해 보니 니미럴,
이제는 더 이상 딸 것도 없었던가 보더라 하여
몇 십 년 지은 농사 포기했어도 아아―
지문처럼 새겨져 버린 내 몸의 고추 농사여

<감상> 고추 농사를 지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지문처럼 몸에 새겨진 골병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허리가 저려오고, 손끝이 아리고, 땀이 눈을 가리고, 매운 내로 코와 입이 얼얼하고, 땡볕에 몸이 그을려 그림자보다 검은 것을. 자식들은 어버이날에 가서 고추를 심고, 추석날 가서 고추 따는 것으로 마무리한 고추농사, 몇 십 년 농사지어도 남는 게 없고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접은 고추농사, 그 뿌리 깊은 통증을 쓰다듬어 가면 내 몸의 어느 부위가 저려온다. 다음 세대에게 절대 물려주지 않고자 했던 어머니의 고추농사, 몸이 없으면 병도 없을 것이기에 신음소리라도 듣고 싶다.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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