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가정 형편에 학업 중단, 송도 바다에 매료…방랑자의 삶
일부 원로 예술가들에만 기억돼 '토기' 단순 나열 구도·최소 색채

김홍 사진

15세기 프랑스인은 집시를 ‘보헤미안’이라고 불렀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회의 관습에 구애되지 않는 방랑자,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던 예술가와 지식인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1970년대 후반, 푸른 영혼을 안고 5년 남짓 우리지역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다 간 화가가 있다. 김홍(본명 김어일 1936~1979)이다. 김홍은 우리지역에서 아마도 최초의 보헤미안적 삶을 살다간 화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의 기행들은 요즈음의 예술가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자유로움과 번민에 대한 몸부림, 그리고 순수한 인간미는 흑백시대에 살아온 세대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존재 의미이기도 하다.

1970년대의 한국사회는 군사정권의 냉혹한 통제와 기성문화에 반기를 든 저항의 청년문화가 뒤엉키던 시기였다. 김홍은 이러한 시대에 ‘인생과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온몸으로 답을 하며 살았던 작가였다. 소주에 소금을 안주 삼아 매 끼니를 때우던 그 시기의 김홍에 대해 포항원로예술가들은 맑은 영혼을 소유한 화가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홍익대학 미술학부 회화과를 중퇴하고 열여덟 번의 개인전과 포항예총창설기념전에 참여했고, 제1회 신라문화제 초대출품과 경북예총미술작가회장으로 활동했다.

도록표지(흐름회)

김홍은 지역 최초 문화예술단체인 ‘흐름회’의 초대전으로 포항에 오게 되었다. 포항에서 전람회를 마친 뒤 자연스럽게 한흑구(문학), 이명석(문화운동가), 박영달(사진가), 김대정(문화운동가), 박이득(문학), 최성소(언론인), 김일광(동화작가) 등을 만나기 시작했으며, 경주의 김만술(조각), 한영구(서예가) 최유근(최부자집 장손) 인물들과도 교류를 가지며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다. 특히 최성소, 한영구, 김일광은 김홍에 대한 일화를 많이 기억하고 있다. 이들은 김홍을 두고 ‘포항의 이중섭’과 같은 인물로 비유하기도 했다.

1970년대는 지역문화운동가 1세대들이 청포도 다방에 모여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논의가 한창 무르익을 때였다. 김홍은 이러한 1세대들의 관심 속에서 전시 활동과 함께 서울, 부산, 대구, 경주 등을 오가며, 얻은 미술문화 관련 지식과 경험을 지역 문화인들과 함께 공유했다. 이 시기에 천마화랑을 운영했던 최성소(흐름회 총무 역임)는 김홍에게 많은 조언을 받았다 한다. 미술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최성소에게 유명한 작가 소개와 화랑 운영에 대한 얘기를 해 주었고, 또한 미술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작가들에게 작가관에 대해 조언과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 몇 안 되는 지역 작가들은 소극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기 연마에만 임하고 있을 때, 김홍은 자신의 예술세계와 경험을 공유했으며 사회적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추구했다. 이러한 김홍의 활동은 무미건조하고 변화가 없었던 1970년대 후반, 외부 지역에서 불현듯 나타나 기인적인 삶으로 많은 화젯거리를 만들어 지역 문화예술계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무일푼인 김홍은 술집에서 지인을 만나게 되면 술을 사댔고, 집집마다 외상을 깔아놓았다 한다. 시공관(현 중앙아트홀) 전면에 포항시 조감도를 의뢰받아 그리기도 했으나, 완성도 되기 전에 술값으로 작업비를 모두 당겨쓰는 바람에 말썽을 빚었던 이야기는 원로예술가들에게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김홍은 송도 바다에 매료되어 초라하게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우리지역에서 그림쟁이로 살아갔다. 방랑자 김홍에게는 허한 삶의 갈기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삶은 호락호락한 게 아니었다. 낯선 도시와 버거운 경제적 현실은 술을 찾게 만들었다.

크로키 복사본.

1936년 상주 외진 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김홍은 어렸을 적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고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그림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1960년대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는 사실은 이를 말해 준다. 그러나 초가집 단칸방에서 형제들과 농사로 겨우 끼니를 이어가는 가정형편으로서는 학업을 이어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마음 여린 김홍은 어쩔 수 없이 학업을 중단하게 된다. 아마도 이때부터 김홍은 방랑의 기질과 채울 수 없는 허한 내면을 채우기 위해 몸부림 쳤는지 모른다. 방랑 생활을 하던 중 부모가 돌아가시고,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장남으로서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 헤어진 부인과 딸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예술에 대한 회의감은 점점 깊어만 갔다. 이러한 안타까움을 동생과 동갑내기였던 김일광에게 아픈 마음을 터놓기도 했다고 한다. 김일광은 거의 끼니를 술로 때우는 것을 알고, 송도해수욕장 주변 중국음식점에 월 단위로 지불하고 김홍의 끼니를 챙겼다 한다. 또한 한영구는 작업실 일부(현 중앙동 신한은행 주변)를 김홍에게 내주어, 그림 그리는데 도움을 주었다 한다. 이 때 김홍은 취미생으로 찾아온 여인과 사랑을 하게 되어 잠시 외로움을 달래며, 용이라는 아들을 얻게 된다. 이러한 일면들은 마치 아련한 흑백시대에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가슴을 젖게 만든다.

어느 날, 김홍은 경주에서 열렸던 신라문화제에 다녀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쪽 어깨에 철골을 심는 수술을 했다. 이후 철골을 빼는 수술을 해야 했지만 병원 가는 일을 미루기만 했다. 화가로서 오른팔이 불편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술을 가까이 하며 작업을 지속하던 1979년 겨울, 설을 이틀 앞둔 날 송도의 한 식당에서 생을 마감한다. 갑작스런 김홍의 죽음은 김일광을 비롯한 몇몇 젊은 문인들은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영구 선생이 비용을 부담해 무사히 장례를 치룰 수 있었다 한다. 이후 김홍의 이름은 일부 원로예술가들에게만 기억 되어져 왔고, 개인의 삶의 흔적들은 먼지가 되었다.

정물화 ‘토기’복사본.

김홍이 죽은 후 작품은 뿔뿔이 흩어졌고, 지역원로 예술가들이 일부 소장하고 있는 작품만으로는 일관성 있는 예술성을 읽어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신라토기의 빛깔과 포항의 푸른 생선의 빛깔에 매료되어 두 빛깔을 함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김홍은 무던히 노력을 기울여 왔다. 세월의 무게를 안고 있는 ‘토기’의 작품은 말끔하게 배경을 블루 색으로 처리함으로써, 칙칙하고 둔탁해 보이는 토기의 채색을 신비로움과 소박미를 돋보이게 한다. 자칫 어눌한 작품으로 보여질 수도 있는 ‘토기’는 단순나열의 구도와 최소한의 색채로 인해, 현대미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작가의 복잡한 삶과는 대비되는 정신세계를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간접적인 심성을 짐작케 해 준다.

문화예술은 능력 있고 인정받는 예술가들만의 세상은 아닐 것이다. 작은 씨앗이 큰 자연을 이루어 내듯, 김홍이 비록 고향도 아닌 우리지역에서 활동하다 잊혀진 인물이지만, 1970년 후반, 메마르고 척박한 지역 문화예술계에 인문학적인 스토리와 미술사에 소박한 행적들은 한 줄기 청량감을 제공해주었다는 측면에서, 김홍의 역할은 소중하다. 혼자 몸부림치다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화가의 삶을 우리는 예술성의 잣대로만 평가할 것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영혼을 기억해 주어야 하는 다정함이 필요하다.박경숙(큐레이터·화가)

박경숙(큐레이터·화가)
박경숙 큐레이터·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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