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학강미술관 관장
김진혁 학강미술관 관장

대구 대륜고 미술 교사로 1968년부터 1985년까지 재직하며 일생을 독신으로 살아간 김기동 현대미술가의 이야기이다. 대전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하였다. 1960년 미술가협회 창립회원으로 4·19혁명 몇 달 후인 1960년 10월 5일 덕수궁 담벼락에 추상작품을 선보였다. 담벼락 전시의 ‘60년미술가협회전’의 오픈날, 출품 작가와 평론가 여럿이 촬영을 하였다.

김봉태, 윤명로, 방근택, 이구열, 박서보 등과 함께 김기동의 당찬 모습도 보인다. 홍익대 4학년 시절에 벌써 아방가르드한 그룹전에 몸을 담았다. 출발은 의기양양함에 그의 눈매가 살아있다. 그 후 몇 년 뒤 동료들과는 거리를 두고 대구로 왔다. 미술교사로 학생을 지도하고 작업실은 대구시내 중심의 동성로에 자리 잡았다. 추상미술과 설치미술에 관심을 가졌다. 1973년 3월 대구에서 열린 ‘EXPOSE’전에 김기동은 “모든 지각작용의 근본이 되는 형상의 선재적 관념을 확인하였고, 그러한 관념과 이미지가 개념예술을 가능하게 한다… 하여 예술적 대상에 대한 시간적 속성, 언어적, 육체적 형식에 의한 표현이 주를 이룰 것이다”라고 글을 남겼다. 이어 현대미술작가전에도 기하학적인 평면회화와 설치작업을 발표했다.

그 무렵 대봉동이라 불리워진 현재의 이천동 오래된 주택가에 거주하였다. 주로 청바지와 군화를 신고 대봉교 옆 대륜고등학교에 오갔다. 필자도 몇 번이나 긴 머리카락에 홀쭉한 김 선생이 가방을 메고 유난히 큰 신발을 덜컥이며 걸음을 재촉하는 광경을 목도했다. 힘겨운 걸음 속에 드리워진 긴 그림자는 삶의 질곡과 고독의 쓸쓸함으로 비추어진 잔상으로 남아있다. 그 후 학교를 그만두고 한동안 대구·경북에 보이지 않았다.

Ep9. 김기동 作100호, 1970년 대

1990년 초, 몇 년간 보이지 않았던 그가 대구 정화랑에 나타났다. 필자도 정화랑에 자주 갈 때였다. 김기동은 근처 여관에서 머물며 소품 유화 40여 점을 준비하여 정화랑 초대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가 끝나고 담소를 나누다 물어보았다.

“선생님 현재 거주하시는 곳이 어디십니까? 이번에 작품은 많이 팔렸습니까?” 너무 궁금하여 예의를 벗어나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당황하며 “여관에 몸을 두고 있으며, 이번 전시에 두세 점 팔려서 경비도 되지 않고 작품능력이 많이 부족한 것 같네요” 라고 겸연쩍은 모습의 씁쓸한 웃음을 주신 표정이 눈에 밟힌다. 그 후 얘기를 들으니 그와 친분이 있는 미술관련 후원자와 이견이 생기면서 그림은 모두 후원자의 손에 들어가고 홀연히 대전으로 떠났다고 들었다. 참으로 서글픈 현실의 경제논리에 적응되지 않는 순수한 예술가의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그가 추구한 작가의 이상이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시간이 흘러 작품 활동은 그만두고 서울에서 보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직계가족도 없는 혼자 몸으로 서울역 지하도에 몸을 의탁한다는 믿기지 않는 애기도 들었다. 또 작고하셨다는 불분명한 소식도 있었다. 그러다 최근 김 작가의 70년대 작업인 여러 점의 대형 평면작품과 그가 애장한 일본과 미국 전문미술 서적들을 보게 되었다. 다시금 특유의 쓴 웃음 모습이 내게 다가왔다. 이어 대구예술발전소 기획전에 연결하여 몇 작품을 선보였다. 한국현대미술계의 아웃사이더이자 초기 대구경북 현대미술의 주역으로 헌신한 위상을 다시 인정하고자 하였다. 최근 대구미술관에도 소품이지만 4작품이 소장되어있다. 하지만 김기동에 대한 관심과 자료 미비로 아직까지 대형작품들이 공개되지 못하고 수장처를 찾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도 더운 여름날 큰 가방을 메고 힘든 걸음걸이로 하염없이 어디론가 걷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대구경북에서 작가에게 관심을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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