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
지 위에 하늘이 펼쳐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
이(順伊)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
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
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감상> 봄은 이내 오는 게 아니므로 단풍잎 떨어질 때부터 미리 마련해 둬야 한다. 빈 가지에 파란 하늘을 그득 담아 둔 그때부터 봄을 마련해 둬야 한다. 봄날 꽃은 한 순간 피어나는 게 아니라 오래 멀리서 찾아온 것이다. 멀리 하늘이 눈썹부터 얼굴로 번지고, 볼을 쓸면 손바닥에 파란 물감 묻어나듯 그리움은 그렇게 오는 것이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그리운 이의 슬픈 얼굴이 비친다. 그리움은 강물처럼 소년의 가슴에 유유히 흘러갔을 것이다. 소년 윤동주가 마련하고자 한 것은 봄날 같은 사랑과 하늘처럼 맑은 세상이었을 것이다.(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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