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히 총을 사고 싶은 적이 있었다
어찌어찌 그 생각을 잊었는지 모른다
총을 사러 부산엘 가겠다고
돈을 꾸고 배를 사서 사막으로 뜨겠다고

한때 천사였던 / 한때 덤불찔레였고 한때 폭약이었던
그가 어떻게 사라져 버렸는지 모른다

지금 내 마음속에 없고 / 돌 속에도 폭풍 속에
물웅덩이 속에도 없다

그는 그가 사라진 줄을 모른다
바보처럼 한때 천사였던 것도 모른다
너무나 깊숙이 사라졌기에
버려진 폐광의 내 속을 캐고 캐도 / 그는 이제 없다

나 혼자 라이터를 들이대는 웅덩이
떨면서 비추고 다시 일그러뜨린다

그를 비춰볼 웅덩이 / 그를 파낼 유일한 광부인
나조차 사라지면 / 그는 아예 없었던 게 된다
그가 잠시 찬란한 천사였던 걸
증거할 자도 / 세상 천지도


<감상> 나를 사랑해서 밀항하고 싶다고 말한 그 남자, 한때 때묻지 않은 천사였던 그 남자, 이제 그 남자는 자신을 까마득히 잊어 버렸다. 그 남자만 변한 게 아니라 여자의 마음속에도 그가 사라진지 오래다. 여자의 마음도 맑고 고요한 물웅덩이는 아니다. 순수했던 옛사랑이, 그리운 이의 얼굴이 물거울에 더 이상 비춰지지 않는다. 결국 내가 증명하지 않으면 이마저 사라지므로 잠시 찬란했던 순간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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