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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I Love 미술] 백락종 100주년에 즈음하여
[김진혁의 I Love 미술] 백락종 100주년에 즈음하여
  • 김진혁 학강미술관장
  • 승인 2020년 03월 04일 17시 40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3월 05일 목요일
  • 1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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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학강미술관장
김진혁 학강미술관장

본명이 백종호 이고 예명이 백락종(白樂宗)인 화가이다. 1920년 대구시 중구 인교동에서 태어나 대구수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동상업학교에 5년간 다녔다. 21세 때 일본 동경의 시나가와 사진전문학원에 1년간 연구생을 하였다. 귀국 후 경주에서 사진관을 연다. 경주에서 김준식, 박봉수, 김만술과 함께 4인전을 개최하였다.

광복 후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이 개설한 서울의 조선미술연구원에 들어가 5년간 회화를 익혔다. 서울 대원화랑에서 1949년 첫 개인전을 열었고 그 해 대구미문화원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펼쳤다. 6·25한국동란 시기인 1951년 대구효성여중고에서 14년 동안 교편을 잡는다. 이 시절 백락종은 남구 영선못 동쪽에 주택과 함께 아뜨리에를 개설하였다.

마침 같은 학교에 음악교사로 재직하던 성악가 이점희의 음악학원과 나란히 위치한 이곳에서 연구생을 지도하였다. 1954년 아뜨리에 발표전시회인 ‘창미전’이 대구미문화원에서 있었다. 화숙 전시회로서는 지역에서 처음 있는 일로 생각된다. 1959년 나재수, 민영식, 동생 백태호와 함께 ‘황토회’를 결성하고 대구공회당화랑에서 창립전을 열었다. 황토회 선언에서는 민족의식이 강한 영남지방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이어서 장소성, 심미성, 시대성을 주장하였다. 교직생활 틈틈이 매일신문, 영남일보, 대구일보 등에 다수의 삽화를 연재하며 다양한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백락종 作 100호, 철조망, 1964

그 시절 대구향교 부근의 돼지 식당에 자주 가며 동료교사와 함께 교원노조결성에 관계되어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것을 계기로 학교를 그만두고 작품창작에만 전념하고자 결심한다. 14년간의 교직을 버리고 서울로 무작정 갔다. 처음에는 정착도 하기 전 많은 시련을 헤쳐나갔다. 판화제작과 탁본화를 만들고 팔아서 조금씩 돈을 모았다. 평소에 관심을 두었던 조선시대 민화와 도자기에 눈을 뜬다. 이것이 중년 이후 한국적 민화풍의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90년대 ‘나의어록’이라는 글에서 “예술은 이론과 기교로 되는 것이 아니라 투철한 자유정신을 통해서 고독과 인내로 창조된다.”라고 밝혔다. 이 시기에 김천시 개령면에 정착하고 만년의 한국적화풍으로 이어 나갔다. 서울과 대구에서 계속하여 개인전을 열고 82세에 ‘백락종 화집’을 발간했다. 다음 해 2003년 타계했다.

생전 대구경북을 위한 예술계의 공적에 비해 아무런 명예나 그 흔한 공로상도 없었다. 참으로 아쉬운 점이다. 마침 올해가 그의 100주년을 맞이했다. 자료를 찾다가 뜻있는 분의 도움으로 유작을 대다수 소장한 개인소장가를 힘겹게 찾았다. 수많은 대작과 소품이 있었다. 사용하던 화구와 안경 등도 볼 수 있었다. 수년 전에 인수하여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번 글을 쓰면서 올 해 추모유작전을 개최하여 근현대미술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앞서간 지역의 선각자로서 재조명 되었으면 한다. 재료는 서양화물감 등을 사용하였으나 항상 동양정신과 한국의 미를 대입시켜 우리 정서로 부단히 실험하였다. 무기교의 선묘를 보여준 작업의 세계는 제대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도록에 쓰여진 삼계(三界)주의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합일시켜 작품의 밑바탕에 탁본기법은 과거, 전면의 형상은 현실, 미래는 무한의 공간으로 표현하고 있다. 며칠 전 개인 소장가 집에서 본 그의 60년대 대표작 100호 사이즈의 작품들인 ‘야유회’, ‘철조망’, ‘신음’을 보면서 가벼운 전율을 담아 온 것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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