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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광장] 무너지고 또 무너지다
[아침광장] 무너지고 또 무너지다
  •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 승인 2020년 03월 05일 16시 01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3월 06일 금요일
  • 1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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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1911년 봄, 삼원포 추가가 대고산 중턱에서 ‘민단적 자치기관’으로 조직된 경학사(耕學社)는 글자 그대로 주경야독을 표방했다. 이는 경학사 조직 5개항 가운데 “셋째, 농업을 적극 장려해 생계방도를 세울 것, 넷째, 학교를 설립해 주경야독의 신념을 고취할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경학사는 “전통적인 도의(道義)에 입각한 질서와 풍기가 확립”된 동포사회를 꿈꾸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교육이었다. 이에 경학사는 곧바로 학교를 세웠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흥강습소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목표는 “기성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해 기간장교로 삼고 애국청년을 수용해 국가의 동량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독립을 향한 청사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생명’을 부지할 산업기반 마련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다. 이 모든 과정의 기초가 될 일었지만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얼마의 시간이 소요될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경학사 사장 이상룡은 ‘경학사 취지서’에 이러한 다짐과 각오를 담았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것은 모두의 책임이니 죽기를 각오하고 힘을 모아 독립을 해야 할 것이다. 어떤 힘든 상황이 닥치더라도 백 번 꺾여도 변심하지 않는다는 의지를 다잡아야 할 것이다. 또한 갈 길이 멀고 더디다고 근심하지 말지니, 작은 걸음이 쌓여 1만 리를 갈 수 있으며, 한 삼태기도 쌓이면 태산이 될 수 있다.”

이미 예견된 어려움을 굳센 의지로 극복하자는 강한 메시지였다. 독립운동기지 건설이라는 새로운 과제 앞에, 한인사회는 무엇보다 ‘굳센 의지와 희망’이 필요했다. 또한 원망과 책임보다는 나라가 무너진 책임이 모두에게 있음을 통감하길 바랐다. 이미 알고 선택한 길이었기에 마음은 모질게 먹었지만,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숱한 목숨이 쓰러졌고, 더러는 견디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1912년 3월 무렵 만주로 망명한 안동의 이원일(李源一) 일가는 가진 재산이 적어 만주 정착 과정에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김대락의 ‘백하일기’에는 “이원일이 국내에서 새로 들어왔는데, 어떤 사람은 이웃집에 나누어 자고, 어떤 이는 빈터에서 노숙을 하니, 처음의 곤액(困厄)을 누군들 겪지 않을까마는 안타깝고 가련한 형상이 마치 홀로 당하는 듯하다.”고 기록하였다. 망명 초기 이원일은 호구지책으로 도장 새기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10대의 여동생과 남동생이 세상을 떠나는 등 고난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은 이원일 일가뿐만이 아니었다.

대흉년과 풍토병으로 수많은 목숨이 쓰러졌고, 결국 1여 년 만에 경학사도 무너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존의 근간이 될 산업 마련, 즉 안정적 농업 경영은 무엇보다 절실했다. 그 대안은 논농사의 성공이었다. 중국인의 소작농으로 살아가야 하는 한인들에게 있어 중국인과 차별화된 논농사의 성공은 생존을 보장할 중요한 작업이었다. 그 때문에 석주 이상룡을 비롯한 망명 경북인들은 ‘신풀이’라 불린 수전(水田)을 개간에 매달렸다. 리더십도 중요하지만 팔로우십도 중요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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