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드득~뽀드득~ 내딛는 걸음마다 '은빛 추억' 쌓이네

겨울왕국으로 들어서는 듯한 설경이 나뭇가지마다 배어난다.

‘걸어서 자연(自然)속으로’ 2월 트레킹은 달아나는 겨울을 잡으며 못다 푼 눈꽃산행의 한(恨)을 풀고자 눈과 바람 그리고 탁 트인 조망 등 겨울산행 최적지인 강원도 평창군에 소재한 선자령 (仙子嶺 ·1,157m)에 가기로 했다.

절기상으로 입춘(立春)이 지난 지 열이틀이나 지났으니 봄의 문턱에 들어섰음을 알 수 있지만 유난히도 지난겨울은 날씨가 따뜻해 설경을 보기가 어려웠던 차에 눈꽃산행으로 일행들에게 눈호강(?) 시킬 생각으로 지난 16일 대관령 북쪽 선자령 겨울산행을 위해 새벽부터 부산을 떨며 내자(內子)와 함께 집을 나선다. 나이를 먹어도 어딘가 떠나는 날이면 설레고 허둥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겨울산행을 위해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게 많다. 모처럼 눈밭트레킹을 위해 오래 묻어 두었던 아이젠이랑 스페츠, 털모자와 두꺼운 장갑도 넣었다. 빠진 게 없는지 다시 한 번 체크해 보고 뜨거운 물과 간식거리도 빠짐없이 챙겼지만 뭔가 빠진 게 있는 듯해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떠남이 좋아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한다.

선자령등산로 입구에 있는 국사성황당 표지석.

포항에서 대관령까지 4시간여를 달려 선자령 등산로 입구인 ‘대관령국사성황당’이라는 큰 돌 표지석 앞에 당도하니 11시가 넘어간다. 840m 대관령에서 시작하는 선자령 등산길은 고원 특유의 밋밋한 산등성이로 나 있어 밋밋함 자체가 선자령 특유의 경관을 만든 덕에 2010년 이후 인기가 급상승한 겨울 산행지로써 초보자들도 쉽게 오르는 겨울 눈꽃산행이기도 하지만 강한 바람과 함께 눈꽃과 상고대를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어 더욱 사랑받는 산행길이다. 주차장에는 많은 버스와 차량들이 붐비고 흩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등산객들이 쉼 없이 오른다.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난 등산로 안내 표지판.

선자령 등산로 중 가장 대표적인 코스가 대관령휴게소를 기점으로 국사성황사, KT기지국과 전망대를 거쳐 선자령 정상으로 올라 원점 회귀하는 왕복 10㎞ 구간이고 다른 하산 코스를 택한다면 정상에서 하늘목장으로 내려서는 계곡코스로 샘터와 재궁골삼거리, 풍해조림지를 지나 양떼목장 담장 길로 내려서는 10.8㎞ 구간이 있다.

기온이 뚝 떨어진다는 예보에 모두들 두툼한 방한복과 방한모, 워머 스카프로 단단히 채비하고 임도로 난 등산길을 힘차게 걷는다. 그새 소복이 쌓인 눈을 밟으며 기분 좋은 눈 꽃밭을 걸으니 계절의 변화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새싹이 움트던 봄이 가고 무덥던 여름을 지나 붉은 물감들이 산천을 뒤덮은 가을을 낙엽처럼 보내고 앙상한 가지마다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겨울동안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추위를 이겨낸 겨울의 끝자락에 포근히 내려앉은 눈이 새로운 봄을 잉태한 채 한파람 세찬 바람에 얼어붙어 영롱한 상고대가 되어 신비한 하모니를 들려주고 있다.

자연의 사계절은 이렇듯 인생의 희로애락처럼 울고 웃고 즐거워하는데 속세에 묻힌 인간들이 제 허물을 벗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못내 안타까움만 일렁이듯 상념에 잠긴다. 바람 없는 아늑한 숲 속에서 눈 위를 뒹굴며 젊은 연인처럼 러브스토리(?)를 재연하는 이원장부부가 일행들을 겨울동화 속 눈꽃세상으로 끌어들여 그지없는 기쁨을 맛보게 한다.

휘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걷는 숲길 사이로 하얀 솜털 같은 눈옷을 입은 나뭇가지가 몽환의 경지를 보이고 굽이친 나무 등걸에 내려앉은 하얀 눈들이 흑백사진을 보는 듯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바람이 없는 숲 속에 백팩킹(backpacking:야영장비와 식량 등을 배낭에 넣고 도보로 여행하는 형태) 마니아들이 쳐 놓은 텐트가 눈에 띈다. 눈밭 위에서의 하룻밤이 얼마나 낭만적일까. 젊음이 역시 좋다. 그리고 부럽다. 하지만 늙음도 그리 서럽지는 않다. ‘걸어서 자연 속으로’ 유유자적(悠悠自適) 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어서 더욱 좋은 것 아닌가.

한참을 오르니 갈림길이 나온다. 우측으로 전망대 가는 길이고 좌측은 선자령 주능선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날씨가 흐리고 눈이 오고 있어 전망대에서의 조망이 별로라 주능선 방향으로 간다. 먼저 간 연맹 전무 일행이 전망대를 들러 내려와서는 전망이 엄청 좋더라는 말에 조금은 후회스러웠다.

‘동해전망대’라 일컫는 곳으로 날씨가 좋을 땐 동해바다가 훤히 보이고 강릉시가지며 주변 산들을 조망할 수가 있어 등산객들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주능선에 올라서면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것이 거대한 풍력발전기의 굉음(轟音)이다, 하얀 설릉(雪陵)에 우뚝 선 풍력발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무서우리만치 큰소리로 산 전체를 울리는듯하다. 주능선 곳곳에 서 있는 발전기가 그림처럼 돌고 있다. 온통 하얀 도화지에 순백의 산이 넘실거리고 더 새하얀 순백의 등대가 된 풍력발전기 날개 사이로 하얀 바람이 인다.

겨울왕국의 한가운데로 들어선다. 산길 옆으로 낮은 나뭇가지에는 상고대와 눈꽃이 만발하여 선자령 성역에 들어온 산객들을 환영하는 듯하다.

‘선자령 0.4㎞’라는 안내팻말 따라 저만치 선자령 정상이 보인다. 하얀 등대처럼 점점이 늘어선 풍력발전기들과 함께 선자령 고원의 칼바람이 산객을 날려 보낼 듯 거세게 몰아친다. 정상이 빤히 보이지만 눈보라와 강풍에 앞을 보기 어렵고 몸을 가눌 수가 없지만 한 발씩 내디뎌 본다.

히말라야 고산을 오르는 듯 어렵게 전진을 하면서도 머리는 맑고 아무 생각 없는 무아지경(無我之境)에 이른다. 힘들어하는 내자에게 응원의 손짓을 하며 억센 바람과의 싸움을 한다. 엄청난 강풍과 살을 에는 추위를 뚫고 선자령 정상 직전에 닿았다. 모두들 무사히 바람의 언덕을 빠져나왔다.

선자령표지석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는 회원부부.

‘백두대간선자령’이란 커다란 표지석이 정상임을 알린다. 먼저 온 등산객들이 기념사진을 찍느라 부산을 떤다. 여기가 우리나라에서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대관령(840m)과 표고차 317m의 선자령(1,157m)정상이다.

바람과 눈, 그리고 사방으로 탁 트인 조망이 겨울눈꽃산행의 최적지임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다.

‘선자령 등산’의 백미는 정상에서 바라보는 주변 산들의 파노라마다.

남쪽으로 발왕산(1,458m), 서쪽으로 계방산(1,577m), 서북쪽 오대산(1,563m), 북쪽 황병산(1,407m)까지 두루 볼 수 있고 동쪽으로 강릉과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장관이 일품이다. 주능선 서쪽에는 짧게 자란 억새초원과 동쪽주변의 숲이 울창한 강릉과 평창의 경계를 이루고 백두대간 큰 줄기가 선자령을 뚫고 지나간다. 선자령 특유의 바람과 풍부한 적설량이 빚어내는 겨울산행의 묘미가 매력적이어서 거친 바람을 헤치며 기어이 오르는 것이리라.

우리네 삶도 어려운 난관을 이겨내고 만나는 희열 때문에 살아갈 맛이 나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느끼는 게 아닐까. 산이 주는 선물이 바로 이런 것이다.

‘선자(仙子)’의 뜻이 ‘신선’ 또는 ‘용모 단정한 여인’으로 해석한다는 뜻에 선뜻 동의할 수는 없지만 백두대간의 주능선으로 그 자세가 큰 품으로 주변을 감싸는듯하다. 1,000고지가 넘는 거산들의 기개가 넘쳐나는 육산(肉山)의 면모를 실감할 수가 있다. 거칠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오래 머물 수 없어 사진 몇 장을 찍고는 바람 없는 숲 속으로 몸을 피해 허기진 배를 달랜다.

미리 준비해온 뜨거운 물과 컵라면으로 언 몸을 녹이고 간식을 안주삼아 소주 몇 모금 마시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눈과 바람을 피하고자 비닐을 뒤집어쓴 채 삼삼오오 희희낙락하는 무리들이 부럽지만 함박눈을 맞으며 먹고 마시는 즐거움도 마냥 좋기만 한다. 피곤한 일상을 떠나 대자연 속에서 좋은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이 순간이 더 없는 순수함이 묻어나는 힐링 그 자체가 아닐까.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세상 속으로 나선다. 영하의 날씨와 시간적으로 빠른 하산이 좋을듯하여 목장길로 내려가는 하산 코스는 포기하고 올라왔던 코스로 되돌아 내려가기로 해 아쉬움을 남긴 채 하산했다.

등산 초입에서 정상까지는 2시간 반이 소요되었지만 내려가는 시간은 그리 많이 걸리지 않았다, 1시간 반 정도 걸려 원점회귀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어 다행이었고 겨울 눈꽃산행의 한(?)을 푼 것 같아 모두에게 감사한다.

늦은 점심 겸 저녁을 강구까지 와서 도루묵찌개와 물가자미회로 2월 트레킹의 마감을 지었다. 다음 3월은 ‘봄 마중 트레킹’이 기다리고 있어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지는 건 필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 같다. 

김유복 경북산악연맹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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