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시1세는 세종대왕과 비견되는 헝가리의 명 군주다. 수도 부다페스트의 상징물인 마차시교회는 헝가리에서 가장 추앙 받는 왕의 이름을 딴 교회다. 마차시1세의 별명은 ‘까마귀왕’이다. 그의 방패에 새겨져 있는 까마귀에서 붙여진 별명이다.

1458년부터 1490년까지 재위 32년 동안 부국강병책과 실리주의 다변 외교로 한 때나마 헝가리를 동유럽의 강국으로 우뚝 서게 했다. 특히 그는 외교의 달인이었다. 마차시1세는 왕족이 아니었다. 귀족의 아들로 전국 귀족들의 회합에서 왕으로 추대됐다. 왕통이 끊어지면 다른 나라에서 왕을 모셔오는 게 유럽의 관례인 점에 비추어 특별한 경우였다.

마차시1세가 왕이 되기 직전 헝가리의 국내 정세는 어수선했다. 사면이 모두 육지인 내륙국가였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침략이 그치지 않았다. 마차시1세의 즉위로 주변 국가들의 압력이 가중됐다. 신성로마 제국인 오스트리아와 북동쪽의 폴란드는 귀족들의 반기가 두려워 헝가리에 대한 압력이 더욱 거셌다. 양국이 협공으로 안보 위기에 몰린 마차시1세는 ‘적의 적은 친구’라는 외교 원리를 이용, 교황과 베네치아, 나폴리 등 이탈리아 정치세력과 화친 외교를 강화했다. 한발 더 나아가 프랑스, 스위스와도 선린관계를 더욱 다져 오스트리아 포위작전을 구축, 헝가리의 위상을 높였다.

마차시가 존경 받는 이유는 동유럽 군주 중 이 같은 다각적인 외교를 현실정치에 성공적으로 응용한 군주가 거의 없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탈리아와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이탈리아의 발달된 문화가 헝가리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탈리아의 학자와 문인들이 부다페스트로 밀려왔으며 헝가리 유학생들이 대거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활발한 인적 교류는 헝가리 문화 창달에 큰 힘이 됐고, 마차시1세는 내치에서도 명군이었다. 세제와 군제를 개혁, 국가 재정과 안보를 튼튼히 했다. 김정은만 짝사랑하는 외곬 외교로 국제 고아가 된 한국 외교가 코로나 방역 실패로 입국을 금지당하는 ‘국제 기피국’으로 전락, 국제 왕따가 됐다. 무능 무지 외교가 대한민국의 자존을 산산조각 내고 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