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 진(秦)나라 목공은 정나라를 치기로 했다. 건숙과 백리해 등 현신들을 불러 의향을 물었다. 둘 모두 말렸다. 목공은 두 현신의 건의를 묵살하고 정나라를 침공했지만 대패의 치욕을 당했다. 목공은 패전의 책임을 장수에게 묻지 않고 자신에게 돌려 백성들에게 사과문을 발표했다.

“우리 조상들은 항상 현자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랐다. 그러나 짐은 그 계율을 어기고 두 현신의 충언을 묵살해 많은 군사를 잃고 그 가족을 슬픔에 젖게 했다. 이제 나는 새로 태어나는 우리 자손들을 위해 나의 과오를 분명히 밝혀둔다.” 목공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시인함으로써 백성들의 사기를 돋우고 힘을 모아 훗날 패배의 치욕을 설욕할 수 있었다.

“내가 임금 자격이 없는 것으로 해서 위로는 조상을 더럽히고 아래로는 신하와 백성을 저버리게 됐다. 오랜 폐단이 근절되지 않고 병든 정치가 갈수록 어지러워져 가슴이 아프고 부끄럽다. 궁정은 엄해야 하는데 청탁질 하는 지름길이 돼 있고, 조정은 바르지 않으면 안 되는데 간신배가 아첨하는 곳으로 변하고 있다. 바른말 올라오는 길이 막혀 모두 침묵하고 선비들의 의견도 갈라진 지 오래인데 아직 화합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 또한 내 탓이다. 오! 오늘의 민심과 나라 형편으로 말하면 전란이 한참이던 임진년 보다 못하니 나라가 언제 망할지 모를 형편에 놓여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구나.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임란 때 한양 도성을 버리고 도망, 백성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선조가 죽기 7개월 전에 발표한 ‘대(對) 국민 사과문’이다. 사과문에 적시된 그 때의 정치 상황이 어쩌면 지금의 정치 상황과 그리 흡사한지 역사의 아이러니다. 재위 41년의 선조는 집권 말기엔 레임덕으로 국정이 극도로 혼란에 빠졌다. 관리들의 복지부동과 부정부패로 나라의 기강은 만신창이가 됐다. “경들의 보고서는 주역보다 더 어렵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관리들의 보고서에 대한 한탄이다.

코로나19의 초기 방역 실패로 확진자가 8000명에 육박하는데도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는커녕 자화자찬, 국민이 화병이 날 지경이다. 참 낯 두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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