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썩이는 파도에 반짝이는 은빛바다
꾸불꾸불 해안길 걸으면 가슴 탁 트여

호미반도해안둘레길 종합 안내판이 바다를 배경으로 멋지게 펼쳐있다.

예로부터 춘삼월(春三月)이라 하여 봄이 왔음을 알리는 시기가 지금인데 요사이 형국이 그야말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지만 봄같이 않음을 이르는 말로 표현 할 수밖에 없는 절체적 난국이다.

우한 폐렴으로 시작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이 창궐하여 8000명이 넘는 확진자와 80여 명의 사망자가 속출하는 아비규환 같은 현실이 되어 불안의 극치에 떠는 사람들의 정서가 말이 아니다. 일상이 없는 그야말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에 살고 있는 듯 아슬아슬하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생소한 용어에 만나고 싶은 이도 만날 수 없고 소모임마저 가질 수 없는 참담한 일이 우리 눈앞에 일어나고 있다.
 

호미반도둘레길에 놓인 몇안되는 데크길에 따사로운 볕이 들었다.

‘걸어서 자연 속으로’의 이번 달 트레킹을 봄맞이 코스로 잡았지만 취소되고 필자와 내자(內子) 둘이서 가까운 ‘호미반도해안둘레길’을 걸었다.

포항 호미곶반도 일대를 걷는 호미반도해안둘레길 다섯 구간(1코스 : 연오랑세오녀길6.1km, 2코스 : 선바우길6.5km, 3코스 : 구룡소길6.5km, 4코스 : 호미길5.6km, 5코스 : 해파랑길33.6km)이 총 58.3km로 만들어져 전국적으로 각광을 받아 많은 탐방객들이 다녀가는 해안 명승 트레일로 조성되어 있다.
 

조용한 대동배 포구에 한가히 날으는 갈매기가 외로움을 달랜다.

그중 3코스와 4코스를 지난 8일과 15일 두 번의 탐방으로 완주했다. 3코스는 동해면 흥환리 흥환해수욕장에서 호미곶면 대동배리까지 6.5km 구간이며 4코스는 대동배 마을에서 호미곶 광장까지 5.6km 구간을 말한다.

집안에 갇혀 지내기가 답답하고 코로나바이러스 뉴스에 지쳐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다스려 볼 양으로 따사로운 봄볕을 맞으며 해안가를 걷는 가족들이 더러 보이지만 나다니기 겁나고 불안한 심리 탓인지 주말이라도 둘레길에 사람이 거의 없다. 평소 이맘때는 반짝이는 은빛 바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꺼억~ 꺽~ 대는 갈매기 울음소리 들으며 봄나들이 나오는 상춘객들로 해안도로가 자동차 행렬로 줄을 이을 시간인데 도로마저 한산하다.

몽돌해변과 밀려오는 파도와 흰구름이 피어나는 봄하늘을 맞으러 해안길을 걷는다.

들머리 흥환리에 주차하고 해안둘레길을 걷는다. 3코스 구간은 2코스(선바우길)에 만들어진 데크길이 없어 자연 그대로의 해안 돌길이라 걷기에는 조금 불편하지만 밀려드는 바닷물과 부딪치는 몽돌이 내뿜는 자연 소리에 취해 아름다운 해안선을 걷는 맛이 운치가 있어 좋다.

푸른 물결 너머 포항 북쪽해안이 가물거리며 보이는 영일만 파노라마.

파도에 밀려 나온 부유물과 쓰레기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하지만 찰랑대는 파도와 한가로이 날아오르는 갈매기, 파란 하늘과 흰 구름, 끝 모를 수평선 너머 영일만을 안고 있는 포항 내륙이 아스라이 가물거리고 수직 벼랑 끝에 억세게 살아가는 소나무의 힘찬 기운이 봄을 맞으러 나온 길손에게 어서 오라 손짓한다.

‘호미반도’라 불리는 이곳은 한반도 전도(全圖)에서도 독특한 지형을 갖추고 있는 곳으로 ‘호미(虎尾)’의 뜻 그대로 ‘호랑이 꼬리’를 형상하기에 기운이 넘치고 한반도의 기(氣)가 뭉쳐 웅비(雄飛)하는 곳으로써 이 고장 사람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 세오녀의 설화가 깃든 곳이며 일월사상과 정신이 배어있는 지정학적 가치나 전래되는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고 대양을 향한 무한한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숱한 문인, 가객이 호미반도와 영일만을 주제로 글을 쓰고 노래하던 곳이다. 일찍이 민족시인 이육사(李陸史)가 ‘청포도’를 읊은 곳이며 낭만 가객(歌客) 최백호가 ‘영일만 친구’를 노래한 아름다운 해안과 늘 푸른 영일만을 끼고 있는 자랑스러운 반도(半島)이기도하다.

아홉마리의 용이 승천하였다는 전설어린 구룡소에 봄볕이 들었다.

흥환리를 출발하여 1시간여를 걷노라면 꾸불꾸불 해안도로가에 우뚝 선 바위가 나타난다. ‘장군이 아이를 업고 영일만으로 걸어가는 형상’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장군바위’다. 외롭게 선 듯한 바위가 좀은 초라해 보이지만 뜯어보면 그럴듯하기도 하다. 장군바위를 지나 대동배 쪽으로 조금 가면 천연기념물 제371호로 지정된 ‘모감주나무와 병아리꽃나무 군락지’가 나오고 해안가 굵은 몽돌과 바윗길을 걷다 보면 데크로 된 길을 만난다. 다시 치켜 오르는 오르막을 한 구비 넘어 해병부대 초소가 있던 곳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서면 호미반도둘레길 최고의 명소로 꼽는 ‘구룡소(九龍沼)’ 전망대가 나온다. 봄볕이 들어 반짝이는 너른 바위와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였다는 아홉 개의 구멍마다 바닷물이 드나들며 용의 숨소리인양 철썩이며 반갑게 맞는다. 바닷가 바위에서 봄(?)을 낚는 강태공의 무심한 몸짓에도 따스한 봄이 찾아든다. 구룡소를 내려서면 호미곶면 대동배리에 닿는다. 여기까지가 3코스 구간이 끝나고 4코스가 시작되는 대동배를 마을사람들은 ‘학달비(鶴達飛)’라고 부른다. 바다에서 보면 마을 모양이 ‘학이 날아가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이름 지어졌다고 하니 퍽이나 재미난 곳이기도 하다.

조용하고 아늑한 포구에 출어를 기다리는 어선들이 조는 듯 묶여있고 무심한 갈매기만 창공을 휘젓고 있다. 대동배마을회관 뒤로 1.2km 임도가 ‘소나무숲길’이라는 이름으로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로 걸을 수 있는 길이 대동배2리까지 이어져 있다는데 필자는 그 길을 놓쳐 조금은 아쉬웠다.

사람의 옆얼굴과 닮았다는 모아이상 바위.

울퉁불퉁한 돌길해안을 걷다 보면 또다시 데크길이 있어 조금은 편하게 걷는다. 오른쪽 수직벼랑의 굴곡진 모양을‘모아이상’이라 이름하는데 영락없는 코 큰 서양인 같아 웃음이 나온다. 다시 해안가 마을로 내려선다. 대동배2리 마을이다. 여기서부터는 해안도로를 따라 포장길을 걸어야 한다. 길 아래 해안이 여전히 눈부시고 멀리 영일만 바다에 떠 있는 대형선박들이 지척인양 선명하다.
 

따사로운 봄볕에 말린 어망을 털고있는 어부들의 모습에 이미 봄은 성큼 닥아온듯하다.

해안 너른 공터에서 출어 준비를 위해 어망을 터는 어부들의 바쁜 몸놀림에도 봄은 찾아들고 있다. 마을 어귀 집 담장 넘어 목련이 꽃망울을 터트리며 반갑게 맞아주는 한낮의 풍경이 따사롭다.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한 켠에 세워진 월보(月甫) 서상만 시인의 시비(詩碑)가 지나가는 길손에게 애틋한 감상을 전한다. 호미곶 출신 시인의 시(詩) 제목이 ‘나 죽어서’다.
 

파란 바다를 향해 봄을 낚는 강태공들 모습 뒤로 따스한 봄이 찾아들었다. (1)

길가 늘어선 짙푸른 해송 가로수가 발길을 재촉하며 호미곶면에 들어섰음을 알린다. 왼쪽 양지바른 너른 광장에 ‘호미숲 해맞이터’라고 새긴 큼지막한 바위가 영일만을 배경으로 봄 햇살에 하얗게 빛을 발하며 우리를 반긴다.
 

영일호미수회에서 세운 호미숲 해맞이터 석물.

‘호랑이 꼬리에 나무를 심자’라는 큰 꿈을 안고 삼십년 전에 발족한 ‘영일호미수회’가 세운 표석이다. 초대회장으로 28년간을 한결같이 ‘호미곶 나무심기운동’을 실천해 온 이곳 출신으로 지역의 큰 어른이며 걸출한 행정가(영일군수·구미시장 역임)로 명망이 높고 뛰어난 문인(文人)으로도 이름을 날리는 청전(靑田) 서상은 선생의 올곧은 성품을 익히 알고 있는 필자로서는 이곳이 남다르게 생각난다. 구순에 가까운 연세에도 ‘호미수운동(虎尾樹運動)’에 매진하시는 모습에 늘 존경과 경외심을 갖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독수리바위앞에서 무심히 해초를 채취하는 여인네 모습이 평화롭다.

호미곶이 낳은 형제 문인으로 월보 선생의 친형으로 많은 시와 수필 등을 지어낸 분이다. 호미숯 해맞이터를 지나 바닷가로 내려서면 ‘독수리바위’가 나온다. 야트막한 바위를 뚫고 불쑥 올라온 모습이 독수리 부리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하늘을 향해 무언가를 물어뜯을 듯 한 기세 앞에 해초를 뜯는 여인네가 어쩌면 저리도 천연덕스러울까. 봄나물 캐듯 건져 올리는 해초에도 봄 내음이 묻어난다.

양지바른 산기슭에 파랗게 돋아 난 청보리가 이곳이 호미곶 구만리(九萬里)임을 알려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흑구(黑鷗) 한세광 선생의 수필 ‘보리’의 배경이 이곳 구만리 보리밭이다. 교과서에 실릴 만큼 명작인 ‘보리’가 오랫동안 여기서 자라고 있다. 구만리 해안을 일명 ‘까꾸리 해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까꾸리’는 갈퀴의 방언으로 청어 떼가 몰려와 갈퀴로 끌어 낼 만큼 많이 잡혔다는 얘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봄맞이 나온 가족과 친구들이 호미곶 상생의 손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낸다.

구만을 지나 대보리(大甫里)로 나서면 호미반도의 정점인 ‘호미곶광장’이 나오고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뜬다는 일출의 명소 ‘상생의 손’이 갈매기와 속삭이는 낭만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까지가 제4코스의 끝이다. 3,4코스 12.6km의 걷기를 마치고 느긋한 마음으로 바다를 음미해 본다.

오후 들어 몰려나온 상춘객들이 삼삼오오 사진을 찍으며 갈매기들의 춤사위에 넋을 잃고 있는 모습에도 따사로운 봄볕이 스며드는 듯 봄날은 왔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의 고약함에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은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 청전 서상은 시인의 시(詩) 한 수를 떠올려 본다.

# 호미곶 파도 #

우우 - 흐느끼며 달려오는 / 저 통곡을 어이 할거나 / 우린 짐짓 목이 메어/
꺼억 꺽 우는 / 갈매기 가슴인데 / 하필 호랑이 꼬리에 와서/
겁도 없이 울음을 부리나.
 

김유복 경북산악연맹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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