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 작가, '무궁화의 여왕'
공주 시절 기록 없어 상상력 창조
현대사 배경 초현실주의적 제의극

통일 신라의 초석을 마련한 선덕여왕을 무대에서 대서사시로 만날 수 있게 됐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년)은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었다. 강대국 위협 속에서 통일의 비전을 세우고 김춘추, 김유신과 함께 외교력, 군사력의 기반을 탄탄히 다졌다. 첨성대와 황룡사 구층탑도 그때 건립됐다. 여성 리더십의 상징이랄까. 하지만 공주 시절의 기록이 전혀 없어 안타깝다.

한국을 상징하는 무궁화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피어난다. 끊임없는 외침으로 갖은 수난을 겪으면서도 5천 년 역사를 이어온 배달민족을 상징한다. 나라꽃이 돼 애국가 가사에 있고 대통령 휘장은 물론 정부와 국회 포장에도 새겨지지만 특별한 이야기나 신화가 없다. 무척 아쉬운 일이다.

선덕여왕이 130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의 다리를 건너 무궁화 여왕으로 역사 무대에 재등극했다. 희곡 ‘무궁화의 여왕’(그레잇웍스)을 통해서다. 작가 김지영 씨는 고대 그리스 비극 형식의 이 창작 대서사시로 새로운 모습의 선덕여왕을 탄생시켰다. 이로써 선덕여왕은 수수께끼의 꽃인 무궁화와 함께 초현실주의적 신화로써 환생했다.

이 제의극 작품은 20년이라는 오랜 잉태 기간을 거쳐 세상에 나타났다. 어릴 적부터 무궁화 신화를 꿈꿨다는 김씨는 지난 2000년 무렵부터 ‘무궁화의 신화’를 9개 에피소드로 기획ㆍ집필하기 시작해 2004년에 ‘무궁화의 여왕, 선덕’을 완성했다고 한다. 초기 작품 완성 16년 만에 이번 희곡이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작가의 당초 목표는 소설이었다. 하지만 소설에 앞서 희곡을 원작으로 내놓은 이유는 소설에서 접하기 힘든 고유의 혼이 희곡에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김씨는 “지금의 한국은 그 어느 때보다 셰익스피어의 시대와 극적으로 닮아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원초적 힘을 가진 희곡이 더욱 강렬한 현실 참여적 메시지와 감동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인다. 소설 작품도 조만간 출간될 예정이다.

상징과 은유의 이번 희곡은 진평왕의 딸로 태어난 덕만 공주가 파란만장한 역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리더십으로 신라를 다스린다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어둠의 신녀 미실에 의해 중앙아시아의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쫓겨난 덕만 공주는 모래 폭풍 등 온갖 고난 속에서 고대 로마와 그리스 등 서역의 새로운 문화와 통치 지혜를 터득하고 돌아와, 혹세무민하는 어둠의 미실을 몰아내고 선덕여왕으로 당당히 등극해 빛의 문화 제국을 세운다.

물론 이 작품은 실제의 선덕여왕 시대를 그대로 다룬 사극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을 뛰어넘어 초현실적 상상의 세계를 그리스극처럼 새롭게 창조해 그려낸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선덕여왕의 공주 시절 기록은 전혀 없고, 타클라마칸 사막 등 서역의 유랑 또한 없었다. 미실 역시 선덕여왕 즉위와 직접 관련이 없었으며, 작품에서처럼 자살도 하지 않았다. 김씨는 “공주 시절의 기록이 전혀 존재하지 않아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여왕의 무덤에 찾아가 예를 표하고 나의 자전적 경험과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초현실적 제의극을 만들기로 했다”고 들려준다.

작품에서 덕만은 민주화 시대로, 미실은 군부독재 시대로 은유화한다. 거대한 죽음의 땅인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생사의 고난을 겪었으나 이를 꿋꿋이 극복하고 돌아와 불법과 폭압으로 진실을 은폐하며 통치하는 ‘검은 무궁화’ 세력을 몰아낸 뒤 참된 무궁화 시대를 열어간다는 것이다. 사막의 꽃이었던 덕만 공주는 빛과 어둠의 대결에서 결연히 승리해 무궁화의 여왕으로 당당히 등극한다.

“나는 되돌아왔다. 그 누구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그 죽음의 사막에서 나는 검이 되어 너희를 베기 위해 살아 되돌아왔다. 무너져버린 법도와 질식당한 정의여! 눈을 뜨라. 대지여, 눈 먼 정의의 잃어버린 심장을 토해내라!”

“사막의 모래바람이 내 영혼 안의 검날을 세웠으니, 이제 천 년의 눈물과 피로 만들어진 사막의 검으로 너희가 만든 그 깊고 검은 무궁화의 시대 한가운데 혼을 벨 것이다.”(‘무궁화의 여왕’ 본문 중)

희망의 메시지를 우렁차게 울리는 피날레 역시 장엄하다.

“어둠을 이겨온 찬란한 빛의 노래, 무궁화 대영광의 노래.” “우리 완전한 기쁨의 노래. 완전히 승리한 무궁화의 노래여.”

이 대서사시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까?”라는 코러스의 물음에 아이들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며 화답한 뒤 모두가 ‘무궁화 대영광의 노래’를 합창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융합의 여성 리더십을 극화한 이 책은 공교롭게도 ‘세계여성의 날’(8일) 무렵에 출간돼 더욱 눈길을 모은다.

정상조 서울대 법대 교수는 추천사에서 “해외 험지에서의 경험과 동서양 지혜의 시너지를 보여주는 ‘무궁화의 여왕’은 요즘처럼 갈등과 위기를 겪고 있는 대한민국에 구원과 희망의 카타르시스가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이번 희극은 이 시대의 덕만은 과연 누구이며, 미실은 또한 누구인가 깊은 울림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작가 김씨도 “나는 군부와 신군부 시대를 여성화해 군부 독재 세력인 미실로 은유화했고, 이에 맞선 민주화 세력의 표상으로 덕만을 대립하게 설정했다”며 “미실이 미화되는 시대를 지켜보며 오랜 시간을 견뎌왔다. 그러나 미실의 시대는 결코 정당화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심판돼야 하고 기억돼야만 하는 시대의 검은 얼굴이다”고 역설한다.



 

곽성일 기자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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