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대던 사람들 다 떠나가 버린
바닷가엔 게 발자국만 어지럽다
지난여름 이글거리던 햇볕 아래서
푸른 갈기를 세우고 온몸으로 달려들던
달려들다 부서지며 포효하던 그 파도들
이제는 순한 짐승처럼 발치에 누웠다
생각하면 내 살아온 날들도 게걸음 같은 것을,
거품 물고 끌고 온 내안의 길들
벼랑 앞에서 더는 나아가지 못한다
저물도록 육자배기가락으로 우는 파도에 기대어
홀로 거니는 발아래 몽돌들만 자글자글 울고
먼 물마루엔 붉은 노을이 색 바랜 깃발처럼
파도 위에 펄럭이고 있다


<감상> 혼자이고 싶을 때, 삶에 회의가 불어올 때 한 번쯤 해남 땅끝으로 가고 싶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파도처럼 격랑을 겪었고 북적대는 무리 속에서 치열하게 살았을 것이다. 땅의 끝에 서면 내 안의 모든 길들이 멈춰지고 자신을 성찰하게 된다. 삶의 막다른 벼랑에선 세찬 파도도 내 안에서 고요해지고 환한 슬픔에 젖어들게 한다. 힘차게 걸어왔지만 뒷걸음치는 게걸음 같고, 울음소리로 가득한 몽돌 같은 게 인생행로가 아닌가. 그렇다고 파도 위에 펄럭이는 노을이 마냥 슬픔으로 펄럭일 수 있겠나. 벼랑 앞에서는 뒤돌아서야 하고, 붉은 노을은 파랑과 어둠을 불러오므로 이제 발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다.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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