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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광장] 나라의 예(禮)
[아침광장] 나라의 예(禮)
  •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 승인 2020년 03월 24일 16시 08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3월 25일 수요일
  • 1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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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문법(code)과 맥락(context)은 내일이 되면 어느새 오해와 편견을 낳는 흉물이 되곤 합니다. 흔히 고전(古典)을 두고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는 감동을 주는 책이라고 합니다만, 변화의 속도가 워낙 빠른 지금은 과거처럼 고전의 출현을 쉬이 용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불과 몇 년 전의 베스트셀러들이 까마득히 망각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게 요즈음의 세태입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 그것 하나만 변치 않는다”라는 부처님 말씀이 더욱 각별하게 다가오는 시절입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는데 안 변하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허황된 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점복술(占卜術)에 대한 기대입니다. 점복에 대한 선호(選好)는 예나제나 변치 않고 우리 주변을 맴돕니다. 장난삼아 드나드는 타로점 가게에서부터 일생을 망치는 사이비 종교생활에 이르기까지 요행을 바라는 헛헛한 마음이 세상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런 요행심리가 확산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나이 든 사람의 입장에서 실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어릴 때 살던 곳이 속칭 점쟁이 골목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선술집을 열었던 관계로 ‘도사’ 단골손님도 몇 분 있었습니다. 그 단골손님 중 한 분이 여태 기억에 남습니다. 얼굴이 관옥처럼 붉고, 표정이 늘 잔잔한 호수처럼 맑은 아저씬데 전쟁 중에 다리 한쪽을 잃어 생계형 점복술사가 되신 분입니다. 그때 그 아저씨가 한 젊은이를 데려와서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하시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제 정신으로는 남의 일을 알 수 없다. 네가 공부를 배우겠다고 하니 말리지는 않겠지만, 남의 앞날을 알려고 애쓰지 말고 네 자신을 알기에나 힘써라. 그러다 보면 길이 보인다.” 아마 그런 말씀이었을 겁니다. 어린 마음에도 “자기를 알기에 힘써라”라는 말이 근사하게 들렸습니다. 그 아저씨는 동네에서 가장 점잖은 분이니까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다른 아저씨나 할아버지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얼큰하게 취기가 돌면 낮에 있었던 무용담을 마구 늘어놓았습니다. 주로 점치러 온 사람들의 흉을 보는 대화였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저였기 때문에 점복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운명론자가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내 삶이 이미 주어진 코드와 맥락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져 왔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제 스스로 예감한 것이나 예측했던 일들이 하나 없이 다 그대로 실현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분명하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착각이지요. 어쨌든, 제 스스로 생각해도 제가 조금 변한 것 같습니다.

말이 길어졌습니다. 다산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중에도 200년 전 당대의 코드와 맥락에 대해 논하고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주역(周易)』이라는 책이 인격 수양의 한 지침으로 고려되지 않고 오로지 길흉화복을 예측하는 도구로만 사용되는 풍조를 나무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인류사회는 코로나19라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현실’로 인해 전대미문의 환난을 겪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미 그것은 ‘해석’이나 ‘설명’의 대상은 아닌 듯싶습니다. 더군다나 섣부른 ‘예측’은 절대 금물일 듯합니다. 다산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늘을 섬기는 마음’이 없는 한 그 어떤 예측도 하찮은 점복술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을 섬기는 마음’이 땅에서 구현된 것이 예(禮)일 것입니다. 다산이 편지에서 적고 있는 “한선자(韓宣子)가 노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역상(易象)을 보고서, ‘나라의 예(禮)가 노나라에 있구나’라고 하였습니다.”라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우리도 인간의 도리를 지키며 환난에 대처하다 보면 머지않아 일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우리나라의 코로나19 대처를 본받고자 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나라의 예(禮)가 대한민국에 있다”라고, 옛말을 빌려 그 소감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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