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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근대미술사] 7. 포항書壇의 개척자, 서예가 신대식
[경북·대구 근대미술사] 7. 포항書壇의 개척자, 서예가 신대식
  • 박경숙 큐레이터, 화가
  • 승인 2020년 03월 24일 21시 39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3월 25일 수요일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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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했던 포항 땅 활발한 의술·서예술로 근현대 지역 서단의 서막 열어
신대식 서예가

1990년에 발간된 ‘포항의 역사와 전통’이라는 사서(史書)에 신대식(호 우송)에 대한 간략한 인물평이 나온다. ‘포항 서단의 개척자는 안진경 필법의 선구자 서병오 제자로 각광을 받고, 향토 서단에 크게 기여한 신대식을 들 수 있다. 석재의 영향을 받은 그는 선전에 입선한 경력을 가지고 1970년대 초까지 포항의 유일한 서예가로 특히 대액에 능했으며, 서울, 대구, 마산 등지에서 개인전을 여러 번 열어 사계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1970년 신대식을 중심으로 모석주, 김완승, 김종석 등이 제1회 향토서화전을 개최하면서 서예의 붐을 일으켰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대식은 우리지역에 제일소아과 병원을 운영하며 ‘유림정신’을 느낄 수 있는 글을 써 왔다. 안진경 필법 연구를 매진하며 조선서도전 입선, 일본대동서도전 입선, 서도 개인전 8회(마산개인전 기준), 한일친서서도전 출품, 한국서화가협회 이사, 국민서예협회 이사, 경북서화가협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경북대학 의과대학 졸, 미국 하-네만 의대수학, 포항시의사회장(1957년 제5대 ,6대), 경북의사회부회장을 역임했다.

신대식은 1918년 7월 23일 대구에서 출생했다. 포항이 고향인 부인을 따라 우리지역에 정착하게 됐고 1950년대 초반에 문을 연 제일소아과(현 불종로 신한은행 옆)를 운영하며 평생을 의사와 서예가로서 살아왔다. 지역 문화예술계 원로 선생님들에 의하면 일부 사람 외에는 주변 사람들과 교류가 잘 없었고 혼자만의 서예술을 연구하는 분이었다는 얘기가 많다. 아마도 서(書)예술을 ‘인격의 완성과 자기 수련의 방편’으로서 무게를 두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신대식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계기는 ‘청포도 다방’을 연구·조사하면서 시작됐다. 신대식이 작고한 지 3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에 대한 기억으로 나이 지긋한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제일소아과 병원장이었다는 이미지만 기억하고 있고, 유명한 서예가이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신대식 부친은 신석우(호 일송)이다. 신대식이 부친의 송자 호를 따서 또 소나무라 해 호를 우송이라 했다. 청소년 시기에 부친이 신대식을 서병오에게 맡겨짐에 따라서 서병오의 외동아들 서복규(호 아석)와 한방에 기거하며 성장했다. 특히 신대식은 서병오의 8능(詩·書·畵·琴·碁·博·醫·辯)중에 글씨와 의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는 신대식이 서예가로서 삶과 의술 활동을 해 왔던 것으로 보아 짐작할 수 있는 부문이다. 서병오가 신대식에게 의사로서의 삶을 권유 한 것에 대한 자료는 어디에도 없지만, 김진혁(신대식 조카)학강미술관장이 기억하기를, 서병오가 신대식이 의과대학을 가기 위한 필수 학습인 영어에 매진하는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한다.

우송 신대식 편저, 석제 서병오.

1977년 11월 신대식은 포항에서 의술 활동을 펼치면서 석재 서병오에 대해 약소나마 전기를 발간했다. ‘우송 신대식 편저, 석제 서병오’ 71페이지의 발간물은 석재 서병오 인물을 평하는데 있어, 전통미술사학자들에게 참고 서책으로 읽혀지고 있다. 이것은 신대식이 우리지역에 의술 활동과 서예가로 활동하면서, 발간한 서책이라 더욱 의미가 있는 자료이다. 서병오가 1935년 작고한 지 38년 만에 1973년 대구미국공보원(USIS)에서 ‘석재 서병오 선생 유묵전’이 처음으로 조명되어 졌다. 아마, 이 전시에서 신대식을 비롯한 제자들이 서병오를 알리기에는 미흡했던 것으로 짐작 된다. 왜냐하면 신대식이 생전, 지우(知友)들로부터 스승 서병오에 대한 전기를 출간할 것을 종용(慫慂)받았다는 점에서 짐작되는 부분이다.

신대식예술전 표지.

신대식이 스승인 서병오의 책 발간물에 대한 취지를 발췌한 내용이다. ‘저자는 자유시로 청소년 시절을 통해 약 십 년 간 석재선생 곁에서 훈도를 받아 선생을 측근에서 모신 관계로 여럿 지우(知友)들로부터 수십차 선생의 유덕을 기념하기 위해 전기를 출간할 것을 종용받았다. 기당시 선생택을 출입하던 많은 제자를 기억할 수 있으나 현재로는 대부분이 작고하고 몇몇 생존자도 거소와 생사가 분명치 못한 현시점에서 저자 역시 의업에 종사하는 분망한 몸이나 우리 고장뿐 아니라 오국의 자랑거리인 선생을 세인들로 해금 재인식시키기 위해 감히 붓을 들게 되었다. 여기 선생의 작품을 소개하고 선생의 약력, 생활상황, 일화 등을 저자가 직접 견문한 대로 기록해 보고저 한다’ 위의 내용으로 보아 신대식은 스승인 서병오에게 제자 이상으로 사랑을 받았던 것으로 짐작되고, 스승 서병오를 알리는데 책임감과 사명감이 투철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신대식과 박영달(사진가·청포도다방 대표)은 초등학교 동창이자 예술가로서 특별한 동반자이었다. 또한 박영달 가족들의 단골 의사이기도 했다. 박영달은 ‘우송 선생의 글씨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필력을 외부에 노출 시켜 과시하지 않고 획 속에 내재시키는 것 같습니다. 정열적인 표현이 아니라 감정을 억제한 이성적(理性的)인 표현이라 할까요’ 라고 그의 저서 ‘란(蘭)을 치는 두마음’에 이렇게 평하기도 했다.

우송 신대식 作 ‘초서’.

신대식의 작품은 침착한 깊은 먹색과 운건한 필성(筆性)이 탁월하다. 김진혁이 생전, 신대식으로 부터 서예 필법에 관한 대화에 있어 기억하기를 “획을 그을 때 죽은 획은 안된다. 글씨는 파도가 치듯 말이 달리듯 운과 기의 획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얘기를 들었다 한다. 그가 당대(唐代) 이후 중국 서도(書道)를 지배했던 안진경체의 특성인 남성적인 힘과 균제미(均齊美), 즉 힘과 운치가 있는 필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차츰 추사의 글씨에 매료되어 점차 ‘미’를 거부하는 독자적인 서체 연구에 힘썼다.

우송 신대식 作 ‘행서’.

신대식이 1950년대 초 척박하고 황량하기만 했던 우리지역에 의술과 서예술을 펼치면서, 1970년 제1회 향토서화전을 개최해 서단의 서막을 열었다는 점에서 문화예술사 측면에서 그의 업적은 중요하다. 대구에서는 스승인 석재 서병오의 전시 때마다 신대식이 서예가로서 함께 작품이 전시되어 꾸준히 알려져 왔는데 비해, 우리지역에서는 그의 존재감과 작품에 대해 한 번도 회자 되지 않았던 점에서 아쉬운 생각이 든다. 지역 근대기에 의사가 몇 없던 시절, 활발한 의술 활동은 물론 서예술사에서 신대식이 개척자이자 첫 인물이라는 중요한 업적을 이제라도 연구조사와 함께 조명해, 깊이 있는 지역 서단사(書壇史)를 다져 나갈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박경숙 큐레이터, 화가
박경숙 큐레이터,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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