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학강미술관장
김진혁 학강미술관장

1976년 겨울 대구시내 경북대학교 치과대학건물 건너편의 최화실에서 황현욱을 처음 보았다. 얼굴이 조금 검은 황현욱은 바바리코트를 입고 화실에 가끔 나타나 바둑을 두며 이런저런 모습을 보였다. 말수가 거의 없고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였다.

안동이 고향으로 서라벌 예술대를 졸업하고 ST 시간과 공간 그룹의 멤버로 활동하다 73년 ‘비오브제’를 타이틀로 명동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74년 제 1회 대구현대미술제에 참가하고 이듬 해 35/128 그룹 창립전을 열었다. 실험미술을 표방하는 젊은 작가그룹으로 대구에서 미술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79년 마지막 대구현대미술제가 열린 시기에 작가로서 마지막 작품을 선보였다. 지금의 대명동 경북과학대학 평생교육원(구 유진어린이 문화관) 전시 공간 벽에 설치작업을 하였다. 회색의 메탈파이프 몇 개를 세워놓았고 파이프 끝 부분에 노랑, 파랑 등의 색을 칠한 설치작업이 기억된다.

이어 이강소 작가에 의한 봉산동 리화랑에서 황현욱은 큐레이터로서의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러 우여곡절 속에 리화랑은 문을 닫았다. 황현욱은 몇 년 후 수화랑의 큐레이터로 다시 일을 시작하였다. 수화랑에서는 많은 기획전을 펼쳤다. 주로 대구경북의 젊은 작가와 일본의 현대작가들의 작업을 선보였다. 반응이 좋았다. 번화가의 2층에 위치한 수화랑은 대구의 명소가 되었다. 일정한 형식의 리플렛과 그가 추구하는 가치는 85년 갤러리 THAT과 86년 삼덕동 129번지의 인공갤러리로 이어졌다.

황현욱의 35,128展 1977

황현욱이 인공갤러리를 통해서 애정을 가진 작가는 김환기 화백의 사위 윤형근 작가였다. 당시 어려운 여건 속에도 윤형근의 전시도록에 많이 고심한 흔적을 담고 있다. 들리는 얘기로 윤형근의 권유도 있고 하여 결국 88년 서울 대학로에 인공갤러리를 오픈했다. 지금의 소극장이 많이 있는 그곳이었다.

동숭동 인공갤러리는 박서보, 윤형근, 이강소 등의 현대작가들과 몇 사람의 국제적 작가를 초대하여 한국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금전적으로 충분치 않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빛나는 선택과 집중의 기획 이였다. 미국의 도널드 저드를 직접 섭외하여 초대전을 열기도 하였고 영국의 대지예술가 리차드 롱의 개념설치미술을 소개하여 세계미술의 흐름을 서울에 알렸다.

이우환 작가와도 친분을 가지며 세계미술사조에 편승하여 앞으로 전개될 미술시장의 경쟁력을 기르고자 했다. 또한 건축과 디자인 영역에서도 인공갤러리는 심플한 공간으로 알려졌다. 그곳에는 멋을 아는 많은 예술가들이 선호하는 장소였다. 젊은 작가도 초대전을 열어 힘을 보태어주었다.

90년대 초반부터 몇 년 간은 한국미술시장이 호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앞서간 것일까? 경영난에 결국 동숭동 인공갤러리는 전시공간으로서는 막을 내리고 말파 라는 카페로 변신하였다. 그도 많은 고민을 하였다고 한다. 말파 카페에서의 쉬어가는 시간은 그를 다시 갤러리스트 로서의 꿈을 키우게 하였다.

결국 대전 유성구에 BiBi스페이스라는 갤러리 겸 카페로 꿈을 키우고자 직접 설계하고 감독하며 신축하였다. 하지만 대전에서 새로운 의욕을 펼치고자 하였으나 건축물공사과정 중 그 뜻을 피우지 못하였다. 2001년 향년 5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너무 짧게 머문 삶 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몇 년 전 월간미술과 언론에서도 황현욱이 이룩한 한국미술계의 앞서간 기획력과 흔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작년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곽인식 추모전에 대구 수화랑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황현욱에 관한 간단한 발제가 있었다. 그를 사랑하고 따랐던 많은 선후배들이 참석하였고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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