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1912년 경학사가 무너지고 한인사회는 안정적 기반을 위해 수전농업 개발에 매달렸다.

중국인의 소작농으로 살아가야 하는 한인들에게 있어 중국인과 차별화된 논농사의 성공은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승패를 결정할 중요한 작업이었다. 그 때문에 만주에서는 습지를 개간하여 수전(水田)을 만드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를 ‘신풀이’라 불렀다.

땅을 가진 중국인들도 수전 개간에는 긍정적이었다. 이 때문에 1년 정도 무상으로 땅을 빌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었다. 무엇보다 힘든 작업은 울로초를 제거하는 작업이었다. 울로초는 뿌리가 서로 엉키는 데다가, 그 뿌리 위에 다른 나무들이 또 뿌리를 내려서, 이를 걷어 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 작업을 끝내고 어렵게 파종을 해도 기후와 토질이 달라 잘 여물지 않았다. .

이러한 작업에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매달렸다. 만주 망명을 대의(大義)라 여겨 기꺼이 동참했건, 강제적으로 왔건, 망명지에서의 삶은 눈앞에 닥친 현실이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겨우 10살을 넘긴 여자아이 허은(許銀)도 이 일을 했다고 할 정도였다. 아주 연로한 노인이나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모두 중요한 노동력이었다. 특히 독립운동가 집안일수록 여성과 노약자들이 이 일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울진에서 만주로 망명했던 최해의 아내 김아지의 경우도 신흥무관학교에 다니는 남편을 대신해서 농사를 지어야 했다. 허은도 “개간에는 이력이 났다.”고 표현할 정도로 농사 경험이 많았다. 특히 결혼 후에는 시어머니 이중숙과 함께 농사일을 도맡아 했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여성일수록 그 힘겨운 ‘신풀이’의 주체로 활약했던 것이다. 여성들의 이러한 노력은 만주 한인사회의 경제적 안정과 더불어 한인사회를 확장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렇게 논을 개간하여 논농사를 짓고 난 뒤부터 비로소 밥을 맛볼 수 있었다. 일 년 비용도 갚고 비교적 안정된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본국에서 농토 없이 고생하는 가난한 친척들을 불러들였다. 먼저 온 애국지사들은 개척지를 계획하는 일부터 이민자들을 배당하는 일을 대대적으로 했다. 이민 온 사람들 관리하고 통솔하는 일이 곧 애국활동이었다. 매년 봄가을로 만주 동삼성 방방곡곡에 널린 한인마을에 수십 호씩의 이민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마 무오년(1918)과 기미년(1919)에 가장 많았을 것이다.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개정판) 중에서)

허은의 이 글은 논농사의 성공이 국내 동포들의 만주 이주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음을 알 려 주고 있다. 1919년 3.1운동으로 독립에 대한 열망이 높아져, 만주망명의 강력한 요소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 배경에는 논농사의 성공이 있었다. 여성들은 새로운 이주자들이 만주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남성들이 만주 이민자들을 조직적으로 배당하고 관리하는 일을 담당했다면, 여성들은 실제 먹여주고 보살피는 일을 수행했다. 이처럼 여성들은 한인사회의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안정, 나아가 한인사회 확산에 적지 않은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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