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이 여름, 깊은 가뭄으로 흠뻑 말라 있으니
와서, 와서들 화전하여라
나의 후회들 화력 좋을 터
내 부끄러움들 오래 불에 탈 터
나의 그 많던 그 희망들 기름진 재가 될 터
와서, 장구 북 꽹과리 징 치며
불, 불 질러라, 불질러 한 몇 년 살아라

한때 나의 모든 사랑, 화전이었으니
그대와 만난 자리 늘 까맣게 타버렸으니
서툴고 성급해 거두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다른 숲을 찾았으니
이제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와서 불질러라, 불


<감상> 어찌 화전하는 대상이 나의 모든 사랑뿐이었겠는가. 내 몸에 깃든 “잡목 우거진 고랭지”는 바로 딱딱한 감각이 아니겠는가. 나의 후회와 부끄러움들, 그 많던 희망들을 깡그리 불태워야 새로운 싹을 틔울 것이다. 내 몸과 마음을 불태울 희생정신이 있어야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갱신(更新)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때로는 서툴고, 엉성하고, 성급하여 거둘 것이 없으나 수도 없이 불을 질러야만 한다. 그러면 언젠가 싹이 움터 열매를 맺을 날이 올 것이다.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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