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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오디세이] 2. 무장사지
[삼국유사 오디세이] 2. 무장사지
  •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 승인 2020년 04월 08일 23시 30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4월 09일 목요일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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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갖은 굴욕·전쟁 시달리며 이뤄낸 찬란한 삼국통일의 꿈
676년 기벌포서 나당전쟁 승리하며 실질적 삼국통일 이뤄
서라벌 암곡 깊은 계곡 투구 병기 묻고 전쟁없는 평화 선포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투구와 병기를 묻었던 자리에 세워진 무장사지.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투구와 병기를 묻었던 자리에 세워진 무장사지.

문무왕은 불우한 유산의 계승자였다. 아버지 무열왕은 백제가 멸망한 다음 해인 661년 세상을 떠났다. 왕위를 이은 김법민, 무열왕 앞에 남겨진 무거운 짐은 거세게 저항하는 백제부흥군과 한반도를 삼키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당나라, 흔들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상대하기 벅찬 고구려 등 여러 적을 상대로 신라를 지키는 일이었다. 신라를 지키면서 대동강 이남을 확보해야 한다는 천명을 완성해야 했다.

그가 받은 천명은 무열왕과 당태종의 외교적 담판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648년(진덕여왕 2) 김춘추는 당나라에서 당태종과 담판을 맺었다. 양국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면 백제 전 지역과 평양 이남의 고구려 땅은 신라에게 할양하기로 하는 일종의 영토분할을 합의했다.

문무왕은 무열왕과 당태종의 담판을 결과물로 얻어내야 할 사명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했다. 게다가 그는 아버지에 이어 진골 2세 왕이었다. 왕위를 노리는 내부의 적들이 호시탐탐 왕권을 노리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한 번 삐끗하면 왕의 자리를 내놓아야 할 형편이었다.

문무왕은 철저히 낮은 자세로 당나라를 대했다. 월나라왕 구천이 오나라왕 부차에게 패한 뒤 온갖 굴욕을 견디며 ‘와신상담’해 결국 천하의 패자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문무왕은 굴욕을 견디며 자신에게 주어진 무거운 운명을 감당해야 했다.

문무왕의 화장터로 추정되는 능지탑.
문무왕의 화장터로 추정되는 능지탑.

취리산회맹이 첫 번째 굴욕이었다. 의자왕이 항복했으나 백제는 아직 망하지는 않았다. 백제부흥군이 곳곳에서 봉기해 맹위를 떨쳤다. 그러자 당나라는 취리산 회맹을 하라며 압박했다. 취리산은 지금의 충남 공주시 우성면의 연미산 또는 대전시 동구와 대덕구에 걸쳐 있는 질로 추정되고 있다. 백제 땅이다.

665년 8월 문무왕은 당의 유인원이 입회한 자리에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 융과 화친을 맺었다. 회맹은 중국 고대의 방식에 따라 단을 쌓고 백마를 죽여 하늘과 땅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말의 피를 문무왕과 부여융의 입에 발라 맹세함으로써 이뤄졌다. 신라와 백제가 영원한 우방으로서 형제처럼 화친하겠다는 내용이다. 맹세의 글은 당나라 장군 유인궤가 썼다. 협박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문무왕은 치욕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함께 정벌했지만, 과실은 당나라가 차지했다. 당나라는 의자왕을 비롯한 포로 1만2000명을 압송하는 한편 전리를 모조리 챙긴 뒤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떠났다. 그런 뒤 취리산 회맹에서 전쟁의 승리자인 신라에게 패배자인 백제와 형제의 화친 맺으라는 것이다. 신라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굴었다.

문무왕의 굴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674년 나당 전쟁 기간 중 신라는 고구려의 반란군을 받아들이고 백제의 옛 땅을 차지했다. 당고종이 크게 노했다. 유인궤를 계림대총관으로 임명하고 신라를 공격하려 했다. 문무왕의 관작을 삭탈한다는 내용의 조서를 작성했다. 그런 뒤 당나라에 머물며 대당외교를 펼치던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왕으로 지목하고 신라로 보내려 했다. 다급해진 문무왕은 사절을 보내 사죄했다. 당고종이 용서했다.

상원 원년(674)에 문무왕이 고구려의 반란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니 당나라 황제가 크게 노하여 유인궤를 계림도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일으키고 와서 치고, 조서로써 왕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이때 인문은 우요위원회대장군임해군공으로 당나라 수도에 있었는데 그를 왕으로 삼아 본국으로 돌아가서 그의 형을 대신하게 하고 아울러 계림주대도독개부의동삼사로 책봉했다. 인문이 간곡히 사퇴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여 드디어 귀국길에 올랐다. 그런데 마침 (신라)왕이 사절을 보내 공물을 바치며 다시 사죄하니 황제가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인문도 중도에 돌아가 전의 관직을 맡게 됐다.

무장사지 아미타불 조성 사적비
무장사지 아미타불 조성 사적비

675년 다시 전쟁이 불붙었다. 신라는 당의 설인귀가 이끄는 군대를 대파해 1400명을 죽이고 이근행이 이끈 20만 대군을 맞아 매소성에서 크게 이겼다. 다음 해인 676년 당의 수군을 금강 하류 기벌포에서 섬멸했다. 신라군에게 대패한 당은 웅진도독부를 건안성으로 옮기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성으로 이전했다. 이로써 신라는 6년간의 나당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대동강에서 함경남도 덕원을 연결하여 원산 이남의 영토를 차지하고 실질적인 삼국통일을 이뤘다.

이때쯤이었을 것이다. 문무왕은 서라벌의 암곡 깊은 계곡에 투구와 병기를 묻고 다시는 전쟁이 없다며 평화를 선포했다. 문무왕은 주나라 문왕과 무왕을 합친 성군이라는 의미인데 투구와 병기를 묻은 사례는 주나라 무왕이 전쟁이 끝나자 병기를 묻고 군사용 말을 농사짓는 데 활용한 데서 착안했다고 한다.

나는 국운이 마침 어지럽고 전쟁하는 시대를 당하여 서쪽(백제)을 정벌하고 북쪽(고구려)을 토벌하여 능히 강토를 평정하고 반역한 자를 치고 협조한 자를 불러와서 드디어 먼 곳과 가까운 곳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위로는 조종(祖宗)이 돌아보아 주심을 위로하였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아비와 아들의 오래된 원한을 갚아주었고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을 널리 추상(追賞)하여 내외 관직을 고루 나누어주었으며, 병기를 녹여 농구를 만들었고, 백성들을 인수(仁壽)의 경지로 이끌었다. -『삼국사기』 ‘문무왕’조

투구를 묻은 곳이 무장사지라는 근거는 『삼국유사』 ‘무장사 미타전’ 조에 나온다. ‘세간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태종이 삼국을 통일한 후에 병기와 투구를 골짜기 안에 감추어서 그 때문에 (무장사)라고 이름했다고 한다’라고 기록했다.

무장사는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부친인 효양이 그의 숙부인 문무왕을 추모하여 투구와 병기를 묻은 자리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무장사지에는 현재 삼층석탑과 아미타 조상 사적비가 남아있다. 아미타불조상사적비는 39대 소성왕의 왕비인 계화왕후가 왕이 죽은 뒤 무장사에 아미타불과 아미타전을 만들 당시 세운 사적비인데 비신은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쌍귀부와 이수만 남아있었으나 최근에 비신을 복원해 세웠다.

대왕암. 경북일보DB
대왕암. 경북일보DB

문무왕은 재위 기간 내내 전쟁에 시달렸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병마에 시달렸던 것 같다. 16년 동안 삼국통일 전쟁과 나당전쟁을 겪으면서 병을 얻었던 모양이다. 그의 유언 첫마디에 언급한 ‘대질(大疾)’이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을 것이다.

국내 정세도 심상치 않았다. 나중에 아들 신문왕이 즉위한 뒤 한 달 만에 김흠돌의 난이 일어난 데서 입증됐듯이 왕위 계승을 둘러싼 어두운 그림자가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다. 문무왕은 태자에게 자신의 관 앞에서 즉위식을 올리라고 유언을 남겼다. 반대 세력에게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죽음 앞둔 문무왕에게 더 큰 걱정은 일본과의 관계 악화였다. 663년 나당 연합군은 백제부흥군과 백제를 지원하러 온 왜군을 맞아 군산 앞바다인 금강하구에서 전쟁을 치렀다. 왜의 군선 400여 척이 불타고 주류성마저 함락됐다. 이로써 백제는 완전히 패망했다. 이 사건 이후 신라는 왜와 극한의 대립관계를 형성했다. 왜에는 전쟁 당시 달아난 백제의 귀족들이 백제 땅의 회복을 노리고 있을 터였다.

문무왕은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욕진왜병(欲鎭倭兵)’하겠다고 다짐했다. 왜병들의 주요 침입 루트인 대본 앞바다에서 왜병들을 섬멸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유언에서 ‘죽은 영혼을 되살려 내지 못하는 일이니 백성들을 수고롭게 할 수 없다’며 화려한 왕릉을 조성 말고 대신 장례를 ‘서국의식’으로 하라고 말했다. 서국의식은 인도의 화장을 말한다. 그의 화장터는 경주시 배반동 낭산 자락에 있는 ‘능지탑’으로 추정됐다. 그는 주검은 유언대로 동해바다 가운데 대왕암에 산골됐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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