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식 포항지역위원회 위원·시인
이상식 포항지역위원회 위원·시인

미국인은 다섯 개의 도시로 정체성을 드러낸다. 신의 성지라 일컫는 예루살렘과 민주주의를 꽃피운 아테네, 공화제로 번영을 이룩한 로마와 타협의 문화를 다진 국민 청원의 무대인 런던, 그리고 독립 선언서 낭독과 헌법을 비준한 필라델피아다.

특히 대서양 건너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는 로마 공화제를 모델로 나라를 세웠다. 언필칭 미합중국이란 제국은 프랑크 왕국에 이은 포스트-포스트-로마인 셈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광대한 영토를 보유한 공화국이자, 선거에 의한 민주주의를 도입한 선구적인 정치 체제다.

인간이 창안한 시스템 가운데 선거제는 매력적 발명품이다. 시민은 공공복리를 위해 권리 일부를 국가에 양보한다고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주장한다. 개인의 권능을 위임하는 최상의 정치 절차로서 선거라는 제도가 탄생했다.

이는 세계사 흐름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독재자가 등장할 경우엔 더욱 그러하다. 민중의 환호를 받으며 나타난 돈키호테는 사회 공학적 신념으로 세상을 재단한다. 히틀러의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 당선이 대표적이다.

겨우 이백 년을 넘긴 짧은 전통의 미국은 수많은 선거를 치르면서 형성됐다. 투표로 선출된 인물들 모두가 유능하진 않았다. 링컨처럼 인품이 훌륭한 위인이 있는가 하면 케네디처럼 신화를 조작한 됨됨이도 있었다. 서구의 선거 내력을 돌아보는 것은 흥미롭다. 우리처럼 일천한 민주 공화국에 타산지석이 되지 않겠는가.

여론은 양날의 칼이다. 역기능과 순기능이 혼재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이놈들이 무엇을 숨기고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워터게이트 특종의 주인공 밥 우드워드 고백. 여기서 ‘이놈들’은 권력자를 뜻한다. 언론의 존재 가치는 바로 그것이라고 여긴다. 강자를 견제하고 약자를 보듬는 정의로운 역할이다.

미국 제33대 대통령 트루먼은 선악의 분별력을 갖춘 지도자로 평가된다. 1948년 벌어진 대선에서 과격한 발언으로 청중의 이목을 모았다. 하지만 모든 매스컴은 상대 후보인 공화당 듀이의 낙승을 예상했다.

저명 언론인 설문 결과도 만장일치로 트루먼 패배를 전망했다. 당선이 확정된 밤에는 시카고 트리뷴이 그의 좌절을 장식한 일면 조간신문을 인쇄하기도 했었다. 트루먼은 평소에 장담했다. “유권자는 갤럽의 조사를 쓰레기통으로 던질 것이다.”

가짜 뉴스는 자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인이다. 그 존립 기반인 상호 신뢰를 해치기 때문이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많은 거짓 소문을 양산한 사례는 ‘참전 용사들 판자촌 철거 사건’이다.

1933년 그들은 퇴역 군인 대우를 늘리고자 워싱턴 한복판에 판잣집 야영지를 설치했다. 당시 후버 대통령은 철거를 강력 지시하면서 기병대까지 동원해 작전이 수행됐다. 이후 좌익 계열은 악의적 선전 선동으로 공론을 주도했다. 이를 허구로 묘사한 책들도 출간돼 혼란을 부추겼다. 대통령 선거 막바지 불거진 유언비어로 후버는 괴물로 인식돼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정권을 넘겼다.

‘천하의 흥망은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중국의 선비 정신이다. 이것은 주권을 맡기는 투표라는 행위에도 해당된다. 리더는 연예인이 아니고 리더십은 장식물이 아니다. 쇼맨십에 현혹되지 말고 잘못된 프레임도 흔하다는 사실을 새기자. 권력은 선거로부터 나온다. 경제학자 슘페터의 말이다. 모래알 같은 집단 지성의 위력을 발휘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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