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검 기상 되살려야…후손에 선조들 절개 알리는 데 여생 바킬 것"

단조 작업을 통해 칼날의 모양을 만든 뒤 풀무질을 하고 벌겋게 달아오른 쇠막대기를 두드린 후 다시 물에 담금질을 하는 열처리 과정을 거치고 있다.
“열 여섯 살 때 큰 형님을 따라 종묘 영친왕 제사에 갔다가 군왕들의 상징적인 검인 사인검(四寅劍)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직접 만들어 갖고 싶은 마음에 시작했던 것이 이제는 검의 전문가로 불리게 됐다”

고려왕검연구소로 사용되고 있는 문경시 농암면 선곡리 폐교된 선암초등학교 건물 내 전시실에는 도검, 창 등 병장기로 가득 차 있어 마치 조선시대 무기고를 연상케 한다.
고려왕검연구소 안내석
이곳 주인은 50여 년 도검제작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이상선 고려왕검연구소장(64·사진)다.

그는 공부가 싫어 상급학교 진학도 마다하고 항시 대장간이나 그릇 등 무엇을 만드는 곳에 가서 놀기도 하는 등 일찍부터 ‘장이’들의 일에 관심이 더 많았다.

충남 예산 출신으로 16세 때부터 도검에 흥미를 느껴 지금까지 도검제작연구의 외길 인생을 걸어오게 된 것이다. 그의 증조부는 한옥을 짓는 목수였으며, 외조부는 상(床)을 만드는 소목이었다.

이렇듯이 그의 피 속에 조상들의 이러한 공예기술의 인자가 필시 포함돼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씨는 2007년 고용노동부에서 전국 처음으로 전통야철도검부문 기능전승자(07-01호)로 선정됐다. 이어 2018년 경상북도 최고 장인으로 선정돼 현재까지 활발한 작품활동에 매진하면서 숙련된 기능계승자를 양성하며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

특히 2010년 경인년(庚寅年)과 2012년 임진년(壬辰年)에는 대대적인 담금질 작업을 통한 사라져 가는 사인검, 사진검의 복원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는 2000년 인천에서 이곳으로 내려와 모든 것을 잊고 옛날 왕들의 장식·호신용인 사인검을 연구 ·제작에만 몰두하는 욕망의 결과물로 우리 민족 고유의 맥을 잇게 된 것이다.
용(辰)이 네 번 겹치는 진년(辰年),진월(辰月),진일(辰日),진시(辰時)에 만드는 사진검(四辰劍)
‘고려왕검연구소’지만 실제는 고려시대가 아니라 조선시대 도검을 재현하고 있다.

이 소장은 “처음에는 고려시대의 검을 연구하려 했으나 관련 기록이 전혀 없어 우선 조선시대 검부터 재현하고 있다”며 “앞으로 고려시대의 검을 재현하는데도 온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그는 “도(刀)는 일상생활에서 쓰는 칼처럼 한쪽만 날카롭게 날이 서 있고, 검(劍)은 양날이 모두 날카롭다”고 설명했다.
호랑이가 네 번 겹치는 인년(寅年),인월(寅月),인일(寅日),인시(寅時)에 만들어진 사인검(四寅劍)
도는 과거 장군들이 전쟁을 치르면서 부하들을 지휘할 때 지휘용 칼로 ‘칼’과에 속하고, 검은 병사들이 전쟁에서 적을 찌르고 베기 쉽도록 만들어져 ‘창’과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씨가 이처럼 조선시대 도검연구에 매달리고 있는 것은 고려시대 도검과 마찬가지로 검의 길이와 특성·형태에 대한 문헌이 남아 있지 않은 데다 연구하는 학자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조선의 도검 등 병장기 생산을 금지한 데 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도검 연구가 끊겨 100년 동안 조선시대 도검연구가 진행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는 대장간과 목공소, 함석집을 찾아다니며 칼을 벼리는 방법, 목제 칼집을 만드는 법, 칼 장식을 만드는 법을 어깨너머로 터득했다.

“전통 칼에 대한 기록과 지침이 없어 박물관에 가서 전통검의 형태를 독학하는라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이 씨는 “도검을 만들려면 정부의 허가가 필요한데 쉽게 나오지 않아 3년을 기다린 끝에 1990년부터 정식으로 칼을 만들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사인검(四寅劍).

이씨가 재현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품은 과거 왕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됐던 사인검이다.

12간지 중 무인을 상징하는 호랑이 인(寅)자가 네번 겹치는 인년(寅年)·인월(寅月)·인일(寅日)·인시(寅時)에 제작된 칼로 12년에 한 번씩 만들 수 있는 사인검은 하늘을 대신해 불의를 베어 세상을 발로 잡는다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거나 북두칠성이 상감돼 있다.

이 씨는 또한 왕들이 장식용이나 호신용으로 지녔던 검으로 용의 기운이 4번 겹친 사진검(四辰劍)도 만들었다.

사진검은 용의 해인 진년(辰年)과 진월·진일·진시에 만든 칼로 사악한 기운을 베어낸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가 사인검과 사진검에 주목한 것은 지금까지 순수한 우리의 전통 도검류로서 불모의 상태로 묻혀 있었다는 점에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문화 암흑기에서조차도 일제가 다른 곳은 모두 손을 대어도 사인검·사진검만큼은 어떻게 하지 못했다고 본다.

우리의 전통도검을 우뚝 세움으로써 도검문화의 맥을 잇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문화의 전통을 후대에 온전히 전승시키고자 하는 생각이다.

옛 대장장이들은 철광석을 녹여 만든 철로 검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제철소에서 구입한 길이 40㎝, 두께 2.5㎝의 철로 두드려 칼을 제작한다.

원래 모든 제작과정을 수작업으로 해야 하지만 이러한 힘든 일을 할 사람이 없는데 따른 궁여지책이다.

단조작업
단조 작업을 통해 칼날의 모양을 만든 뒤 풀무질을 하고 벌겋게 달아오른 쇠막대기를 두드린 후 다시 물에 담금질을 하는 열처리 과정과 빛이 나도록 광택을 내는 연마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칼날이 만들어진다.

열처리 과정에서 많은 불량품이 발생하는 것은 열을 받은 쇠는 굽어지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칼날이 휘어진 형태의 도는 비교적 쉽게 완성품이 나오지만, 검은 형태가 직선이어서 불량품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 완성률이 10%도 안 된다는 것이다.

연마작업
연마 과정을 마친 칼은 쉽게 부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 칼날 부분에 부드러운 금속 성분을 입혀야 한다.

이 때문에 잘 만들어진 칼의 칼날에는 구름 모양의 무늬가 생기기 마련이다.

칼은 강하기만 하면 쉽게 부러지기 때문 강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지녀야만 비로소 좋은 칼로 꼽힐 수 있다.
연마작업
좋은 칼이 만들어지면 칼집을 만들어 한다.

특히 현대는 도검을 살상용이 아닌 장식용으로 소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제작자들은 칼집과 손잡이 장식에 많은 공을 들인다.
조각및 상감작업
이씨가 만든 장식용 도검은 칼집 겉면은 가오리 가죽을 사용하고, 내부는 호두나무나 감나무로 만들어 부드럽게 칼날이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이상선 고려왕검연구소장이 전통도검을 조립하고 있다.
손잡이는 황동에 은으로 문양을 새긴 상감기법을 사용해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풍과 위압감이 느껴지고 칼에는 섬뜩한 푸른색이 감돈다.
고려왕검연구소 전시실
이곳 전시실에는 일반인들이 사극에서나 볼 법한 지팡이 검과 죽통을 칼집으로 사용했던 검, 칼날에 대종교 경전인 천부경을 새긴 검 등 다양한 칼이 전시돼 있다.

11가지 도검제작과정을 거쳐 완성되는 검이 일반인들에게 전달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과 절차가 필요하다.

일반 장검을 한 자루 만드는 데만 15일 이상이 걸리며, 소비자가 구입하고 싶어도 총포·도검·화약류 등의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에 영향을 받아 관할 경찰서에서 소지 허가증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검도인들이 소장하려는 일반 진검은 개당 150만원 이상이어서 쉽게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영화 ‘왕의 남자’에 그가 만든 칼이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한 후 진검을 사용하는 검도장이나 명품 칼을 소장하려는 사람들의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 씨는 판매를 위해서가 아니라 도검을 만드는 일이 자신의 천직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상선 고려왕검연구소장은 “우리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사용해 온 도검을 누군가는 재현해 그 기상을 되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려와 조선시대 도검을 재현해 후손들에게 선조들의 절개와 호국정신을 알려주는데 앞으로 남은 여생을 바치고 싶습니다”라고 다짐했다.

다행히 딸 혜은씨와 아들 성대씨가 기능전수를 이수하며 아버지를 도와 도검을 만드는데 전념하고 있어 이 씨의 마음이 든든한 모양이다.

지금까지는 전통 도검류를 발굴, 계승하기위해 노력해 왔지만 이제부터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창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란다.

전통공예의 길을 천직으로 알고 50여년을 쉼 없이 달려온 그는 이렇듯 쉽지 않은 길을 가면서도 늘 지치지 않은 열정을 볼 때 전통도검제작기술을 잇는다는 자부심 속에서 그의 장인다운 풍모를 엿볼 수 있다.

이 씨는 대구·경북지역 기능인 봉사단체인 대경기능봉사회 부회장을 맡아 활동을 하는 등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매년 500시간은 봉사활동을 하려고 노력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주민들에게 미안하기만 하다”는 그는 “앞으로 자신이 받은 많은 성원을 불우한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기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했다.

황진호 기자
황진호 기자 hjh@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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