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코로나19가 조금씩 수그러드는 느낌입니다. 방역 당국과 국민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이루어낸 보기 드문 성과입니다. 가히 국난 극복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역병과의 최대 격전지였던 대구에 사는 사람으로서 더욱 각별한 감회가 솟구칩니다. 다소 엉뚱한 생각인지 몰라도 저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을 떠올립니다. 열두 척으로 수백 척의 적군을 물리친 충무공의 임전무퇴, 멸사봉공의 정신이 면면히 우리의 핏줄 속에 흐르고 있음을 이번 국난 극복에서 확인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근심 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두 달 동안, 하루도 근심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은 몇 사람이나 확진자가 생겼는지, 또 몇 분이나 돌아가셨는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었습니다. 이제 그런 ‘근심 기반 사회’에서 벗어나 다시 일상 사회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기쁩니다. 예전에는 몰랐던 하루하루의 평범한 생활의 고마움을 만끽해야겠습니다.

풍화가인(風火家人)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역에 나오는 말입니다. “가인(家人)은 이여정(利女貞)하니라”가 주역 서른일곱 번째 ‘풍화가인’, 가인괘(家人卦)의 경문(經文)입니다. 집안의 사람들은 각기 자기 자리를 잘 지키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중에서도 안사람이 바르게 위치하는 것이 이롭다고 특히 강조합니다. 따듯한 기운(불)을 만들어내는 힘(바람)이 그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불을 지피고 지키는 사람이 안방마님입니다. 안에서 받쳐주고 밖에서 이에 호응하여 바로 하면 군자의 삶은 더욱 치열해진다고 상전(象傳)의 풀이는 밝히고 있습니다. 내조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로도 읽힐 수 있겠습니다만 넓게 해석하면 ‘하던 대로 꾸준히 잘해 나가기’를 권면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본분을 잃지 않고 ‘물휼이길(勿恤而吉), 근심 없이 행복하게 살기’를 도모하라고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근심을 좀 덜고 저도 제 일상으로 돌아가 문학적으로 풍화가인(風火家人)을 살펴보겠습니다. 전래 이야기 속의 대표적인 반(反) ‘풍화가인’적 인물들이 누구였던가를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동서양의 옛이야기 속에서 악역을 맡은 어머니들(신데렐라, 백설공주, 장화홍련 등에 등장하는 계모)이나 <흥부가>의 놀부마누라, <심청가>의 뺑덕어멈 같은 이들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그 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백설공주」의 계모이겠습니다. 자신의 미색(美色)을 무색케 만든다는 이유 하나로 의붓딸을 죽이라고 사주하는 어머니입니다. 이 모진 여인도 처음부터 반(反) ‘풍화가인’적인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백설공주가 일곱 살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공주가 성장해서 아름다워지자 그렇게 흉해진 것입니다. 자신의 미색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이 젊은 어머니는 누군가 자신의 ‘미의 여왕’ 자리를 뺏으려 하는 것에 큰 위기감을 느낍니다. 풍화가인의 소임을 저버리고 악의 화신이 되고 맙니다. 그리스 신화의 파리스가 황금 사과를 아프로디테에게 준 이래로 ‘미인(美人)’을 능가하는 가치가 여인들에게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미(美)의 중심이 되는 자리’를 두고 목숨을 걸고 다툽니다. 같은 ‘계모의 구박’이지만 신데렐라가 받은 것보다 백설공주가 받은 게 훨씬 더 잔혹했습니다. 신데렐라와 백설공주는 서민과 공주라는 출신성분도 다르지만 갈등의 원인과 갈등의 주체라는 측면에서도 많이 다릅니다. 이야기의 종류가 서로 다른 것이지요. 미색을 다투는 것(백설)과 먹는 것을 다투는 것(신데렐라), 그리고 갈등이 생성되는 관계가 모녀 사이인 것(백설)과 형제(자매) 사이인 것(신데렐라)이라는 점이 두 이야기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풍화가인’의 두 원류라고나 할까요? 이상은 ‘근심이 물러간 뒤’ 심심파적으로 드리는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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