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학강미술관장
김진혁 학강미술관장

며칠 전 대구중심 범어네거리 부근 선술집, 문화예술계 인사와 언론사 기자 등 몇 분과 함께 막걸리 자리를 했다. 술이 거나한 분위기에 하양읍이 고향인 한 분이 “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물띠미에서 바라본 금호강과 경산 하양벌판이다.”고 언뜻 지나가는 소리를 던졌다.

그 한마디에 순간 찡하고 느낌이 왔다. 1980년대 초 첫 직장으로 영천 금호에 미술교사로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대구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아양교, 동촌, 반야월, 청천, 물띠미를 지나 하양읍을 거쳐 금호읍에 출퇴근한 추억의 낭만이 회상되었다. 그 시절 버스에 몸을 싣고 매일 지나치는 하양 물띠미 언덕에서 바라본 풍광은 아름다웠다. 강변 사과밭의 과수원이 어울려 마치 공기원근법을 보여주는 풍경화처럼 신선함이 느껴졌다. 이어 한국회화사에 첫손가락으로 꼽히는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1676~1759)이 떠올랐다.

화성으로 불리 우는 겸재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41세에 음직의 특채로 종6품의 관상감(천문학 교수)을 시작으로 1721년 46세 때부터 51세까지 경산 하양현감을 지냈다. 영조가 특별히 아꼈던 사대부문인화가 겸재는 이 시절 대구경북의 아름다운 강산을 많이 그렸다고 전해진다. 특히 겸재가 그린 영남첩은 분명 하양의 물띠미에서 바라본 금호강과 현재의 대구동촌유원지 풍광, 팔공산 등을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영남첩은 현재까지 전하지 못하고 대략 겸재식 진경산수로 추정할 뿐이다.

물띠미에서 바라본 금호강.

겸재 정선은 어떻게 하양의 산과 강을 아름답게 그렸을까? 우리는 겸재의 시기별 그림 중 남한강 상류의 청풍을 그린 강상경치로 상상할 수 있다. 하양현감을 마치고 몇 년 후 단양팔경의 화첩을 남겼기 때문이다. 겸재는 우암 송시열과 삼연 김창집의 영향으로 천문지리와 음양원리의 주역에 통달했다. 그러한 연유로 우리나라의 풍광을 진경산수화로 표현한 것이다. 토산과 바위준법, 산과 강, 강함과 부드러움, 현장에 근거한 강조와 생략 등 겸재식 산수화는 동아시아 회화사에서도 독보적 존재감을 보여준다. 그러하기에 국보로 지정된 <금강전도> <인왕제색도>가 있다. 만일 겸재가 물띠미에서 바라본 금호강과 하양을 그렸다면, 당시 국제적 기준의 중국식 관념산수를 벗어나 자신만만하게 우리강산을 현장사생으로 담대하게 표현하였을 것이다. 물결이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고을인 하양의 아름다운 마을 전경과 강과 들판, 멀리서 볼 수 있는 산세들을 애정 어린 준법으로 영남첩에 남겼을 것이다. 만일 화첩이 발견된다면 대구경북의 대표적 보물 그림이 될 것이 확실하다.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4월 어느 오후에 물띠미로 갔다. 그런데 오늘날 하루가 달라지는 하양읍 주변과 금호강은 많이 변하였다. 제대로 관리 되지못한 강변은 지저분한 쓰레기가 보였고 콘크리트의 간선도로가 생겨 옛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아쉬움이 몰려왔다. 예전에 진 맛을 보여준 매운탕집들도 사라졌고 국도에 오가는 차량들만 속도를 내어 달렸다. 강가로 내려갔다. 물가의 햇빛은 하양의 이름값으로 아직도 반짝인다. 멀리서 물새들이 노닌다.

겸재가 하양현감으로 지낸 300년 전과는 천양지차이지만 그래도 물띠미의 강물은 경산과수원과 어울려 감동을 준다. 별이 쏟아진다는 청천과 물띠미 금호강에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시도하면 어떨까? 여기에 바로 옆 대구가톨릭대학교의 김종복미술관과 천연기념물로 중생대 백악기의 퇴적화석 스트로마톨라이트의 거북돌, 하양의 팔공산 자락에 자리한 환성사 신라고찰, 그리고 승효상 건축가의 하양무학로 교회를 연결시키면 분명히 새로운 관광벨트로 훌륭한 자원이 될 것이다.

글을 쓰며 별이 쏟아진다는 청천마을이 생각나고 아름다운 금호강의 달빛을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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