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최근 한 경제지에서 코로나 사태로 인한 불황의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업계가 소위 ‘헤리티지 마케팅’에 돌입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헤리티지(Heritage)’, 즉 유산(遺産) 마케팅이란 급변하는 시장 트렌드에 적응하는데 부담을 느끼는 소비자들에게 깊은 역사를 지닌 브랜드의 상품이나 서비스를 부각 시킴으로써 안정감과 신뢰감을 전달하여 고객의 구매를 유도한다는 전략이다. 오랜 역사를 통해 그 우수성과 경쟁력을 인정받은 브랜드의 제품을 고객이 구매함으로써 그 유구한 전통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유혹하는 사업 전략은 자신보다 ‘더 큰 무엇인가’에 소속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파고드는 최고의 상술이 아닐 수 없다.

‘헤리티지’에 대한 사람들의 애착과 갈망은 비단 상업적 제품이나 상업적 서비스의 소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국가,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사회, 우리의 삶의 방식을 규정하는 제도 또한 우리가 이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소중한 ‘헤리티지’가 될 수도 있지만 다 쓰레기통에 내다 버리고 싶은 ‘악습(惡習)’이 될 수도 있다. 근대 시기 이후로 인간 사회의 운영 원칙과 기준, 규율을 만들어오고 지탱해온 서양인들만큼 자신들이 지금까지 지켜오고 유지해온 ‘헤리티지’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과 의무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없고, 이는 지금의 코로나 사태에 대응하는 그들의 태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의류메이커 버버리(Burberry)는 1856년 창립 이래 지구 전역을 누빈 탐험가들과 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군인들에게 군복과 텐트 등을 제공하면서 국가의 번영에 기여하였다. 이 회사는 국난에 항상 그래 왔듯 사회에 대한 자신들의 의무를 다한다는 정신으로 의료진이 급하게 필요로 하는 의료용 가운과 마스크를 코트 공장에서 생산하기로 하였다. 올해로 100세인 톰 무어(Tom Moore) 예비역 대위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국가의 승리와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일조하였다.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영국 사회의 ‘헤리티지’를 보전하고자 훈장을 달고 보조기구에 의지한 채 25미터 길이의 뒷마당을 100회 왕복하는 ‘뒷마당 챌린지’에 도전,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를 위해 무려 27백만 파운드(한화 405억 원)를 모금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어차피 장사도 안되고 외출도 못 나가는 상황에서 마스크나 만들고 마당 산책이나 해서 주목을 받는 것이 좋지 않느냐 라는 시니컬한 시각은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헤리티지’에 얼마나 자부심을 느끼고 그것을 지켜내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얼마나 강한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들만의 ‘짧은 식견’일 뿐이다.

일제 식민 통치를 벗어나면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던 대한민국에는 과연 서양인들이 느끼는 프라이드를 온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우리만의 ‘헤리티지’가 있는가. 지금 한국 사회를 운영하는 원칙, 기준 그리고 규율은 오랜 역사를 통해 그 우수성과 경쟁성이 증명된 ‘헤리티지’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기존 지배세력이 자신들의 안녕과 편의를 위해 국민에게 강압한 ‘악습’이라고 보는 시각이 민주화와 더불어 부상하였다. 이에 대한민국은 우리의 진정한 ‘헤리티지’가 무엇인가를 두고 세대별로, 지역별로 치열하게 싸우는 ‘거대한 결투장’으로 오랫동안 존재해왔다. 지난 4.15 총선에서 국민은 여당 대표의 말대로 대한민국의 ‘헤리티지’를 정의하고 수립할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를 진보 여권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는 국민이 선사한 최고의 기회이자 최후의 기회이다. 이런 엄청난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온 국민이 자랑스러워하고 목숨을 걸면서 지켜내고자 하는 ‘헤리티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이번 총선에서 보수 야권이 당한 ‘궤멸’을 뛰어넘는 ‘전멸’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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