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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오디세이] 3. 이견대와 만파식적
[삼국유사 오디세이] 3. 이견대와 만파식적
  •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 승인 2020년 04월 22일 21시 22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4월 23일 목요일
  • 1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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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에 지구촌이 공포로 떨고있는 지금 세상풍파 잠재우는 만파식적 선율 절실
신문왕이 대왕암을 바라봤던 이견대.

4월 하순인데 봄이 봄이 아니다. 일찍 핀 꽃이 서둘러 지고 꽃이 진 자리에 푸른 잎이 돋아난다. 시절의 사이클이 여름 쪽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며칠째 날은 차고 바람이 거세다. 경주시 양북면에 있는 이견대에 올라 1300여 년 전 신문왕이 그랬듯이 멀리 대왕암을 바라본다. 문무왕 김법민의 해중릉이다. 『삼국유사』에서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된다는 그 산이다. 신문왕이 그 산에 들어가 대나무와 검은 옥대를 얻었다. 왕은 궁으로 돌아와 대나무로 만파식적을 만들었다. 피리를 불면 나라의 크고 작은 근심이 사라졌다. 역병이 지구촌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만 가지 걱정과 시름을 잠재운다는 만파식적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이견대에 부는 바람은 거세고 이견대에서 바라보는 대왕암에는 파도가 거칠다

이견대에서 바라본 대왕암.

신문왕(神文王) 김정명(재위 681-692)은 ‘금수저’를 물고 나왔다. 할아버지 무열왕 김춘추와 아버지 문무왕 김법민은 평생을 피 말리는 전쟁터에서 보낸 반면 신문왕의 치세 12년은 상대적으로 탄탄대로였다. 신문왕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왕위에 오른 지 한 달 만에 장인인 김흠돌이 흥원, 진공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성골왕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김춘추를 시작으로 진골이 왕이 되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왕이 되는 자격을 가진 이들이 널리고 널렸다. 왕으로서는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터. 문무왕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진골귀족을 견제했지만 오랜 전장에서 얻은 병으로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죽기 전에는 정무를 돌보지 못할 정도로 병이 깊었다. 진골 귀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흠돌이다. 김유신계의 진골이었다. 김유신의 조카이면서 사위였다. 김유신의 동생 정희의 아들이고 김유신의 딸 진광의 남편이었다. 김유신, 무열왕, 문무왕과 함께 수많은 전장을 누비던 백전노장이었다.

낭산 자락에 있는 신문왕릉.

진골 귀족의 반란을 예견한 문무왕은 죽기 전 아들에게 자신의 널 앞에서 왕위에 즉위하라고 당부까지 했다. 김흠돌의 난은 난이 일어나기 직전 서불한 진복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신문왕의 어머니 자의왕후가 북원(지금의 원주)에 있는 오기공을 불러 호성장군에 임명하는 등 선제적인 조치를 함으로써 진압할 수 있었다. 김흠돌을 비롯한 반란 세력은 모조리 처형당했고 김흠돌의 딸은 쫓겨났다. 신문왕과 김흠돌의 딸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반란 사실을 알고서도 입을 다물었던 이찬 군관도 나중에 처형당했다.

김흠돌의 난을 평정하면서 신문왕은 날개를 달았다. 왕은 준엄한 교서 내리며 왕으로서의 권위를 확고히 했다. 그는 교서에서 역적의 ‘잔가지와 잎사귀’ ‘흉포한 무리를 쓸어’냈다고 말했다. 김유신계의 진골 세력과 김유신계의 지지기반인 화랑 출신들이 괴멸되다시피 했다. 왕은 이를 계기로 화랑제도도 폐지하면서 권력을 틀어쥐었다.

내부의 적을 소탕한 신문왕은 새 시대를 왔음을 안팎으로 선포하는 상징조작이 필요했다. 교서에서 밝힌 것처럼 ‘천지신령의 보우에 힘입고 종묘영령의 보살핌’이 자신에게 있음을 담보해줄 새로운 상징 아이템이 필요했던 것이다. 진평왕 시대에 등장한 천사옥대와 황룡사 장육존상, 황룡사 구층탑 같은 삼보(三寶)는 유통기한이 완료됐다. 삼국시대 신라의 보물로 기능할 뿐 부피와 위상이 커진 통일신라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새롭고 독창적인 신물(神物)이 절실했다. 신문왕은 그 신물을 동해의 용이 된 아버지 문무왕과 전쟁 영웅 김유신의 권위에서 발굴해냈다. 만파식적과 흑옥대가 신문왕의 위대함을 보증하는 신화였고 자신만을 위한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이었다. 아버지가 투구를 묻음으로써 평화를 선포했다면 그는 피리를 통해 국토를 지배하는 피비린내를 지우고 싶었다. 선율로 평화와 안녕을 구현하는 인간의 시대를 열고 싶었다.

682년 즉위 2년 5월 7일 왕이 이견대로 행차했다. 이견대는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에서 차용했다. ‘비룡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면 이롭다’는 뜻이다.

신문왕이 문무왕을 위해 지은 감은사.

왕이 기뻐하며 그달 7일에 이견대에 행차했다. 그 산을 보고 사람을 보내 살피게 했다. (…) 왕은 감은사로 가서 묵었다. 이튿날, 환한 대낮에 대나무가 합하여 하나가 됐다.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쳐서 7일 동안이나 캄캄했다. 16일에야 바람이 걷히고 파도가 가라앉았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갔다. 용이 흑옥대를 가져와서 바쳤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 부시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다 속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공은 다시금 천신이 되셨습니다. 두 성인이 한마음이 되어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큰 보물을 내어 저를 시켜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이 감은사에 묵었다. 17일에 기림사 서쪽 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 이공(효소왕)이 대궐을 지키다가 이 일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하례 드렸다. 천천히 살피더니 “이 옥대의 여러 쪽들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네가 어찌 아느냐” 태자가 말했다. “쪽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 보겠습니다.” 이에 왼편 두 번째 쪽을 떼어 시내에 담그니,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그 땅은 연못이 됐는데 용연(龍淵)이라 부른다. 어가가 돌아와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했다. 이 피리를 불면 적이 물러나 병이 나았다. 가물다가 비가 오고 비 오다가 개었다. 바람이 잠잠해지고 물결이 가라앉았다. 이름하여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하고 국보로 삼았다. - 『삼국유사』‘기이’ 만파식적

신문왕이 옥 한 쪽을 던지자 용이 되어 올라가고 그 자리가 연못이 됐다는 용연.

김흠돌의 난을 진압한 이후 정국은 어느 정도 안정됐던 것으로 보인다. 신문왕은 이견대와 감은사, 대왕암을 오가며 11일 동안 왕궁을 비웠다. 대나무와 흑옥대를 얻는 과정에서 문무왕과 김유신을 용과 천신으로 함께 등장시킨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김흠돌의 난 이후 괴멸되다시피 한 김유신계 귀족들의 마음을 살 동기가 필요하던 차였다. 두 영웅이 손을 잡고 자신의 뒷배를 봐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흘리는 효과가 있다.

신문왕은 왕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상징조작의 정점을 찍는 신화를 하나 더 만들어낸다. 바로 용연(龍淵)이다. 옥대에서 옥 한쪽을 하나 떼어내 시내에 던지자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용이 솟아오른 시내는 못이 됐고 용이 하늘로 오르면서 뚫고 오른 바위는 폭포가 됐다. 용연폭포다. 이제 왕은 바닷속의 용, 물에 사는 용의 수호를 받고 있다. 옥대에 있는 옥의 쪽이 모두 용이라는 사실을 용연에서 증명했다. 얼마나 많은 용의 호위를 받고 있는가. 이 신비스런 일의 내막은 태자 이흥(나중에 효소왕)이 왕궁에서 말을 타고 와 알려줬다. 신화에 아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아들의 왕위계승에 정통성을 부여했다.

효소왕도 만파식적 신화에 슬쩍 올라탔다. 국선 부례랑(실례랑)이 오랑캐에게 납치됐다가 돌아온 사건을 계기로 만파식적의 이름을 만만파파식적으로 바꿨다. 의미의 부피를 살짝 확장했다. 만파식적은 일본왕에게도 큰 위협이 됐다. 원성왕 2년 786년 일본왕 문경이 신라를 치려다가 만파식적의 존재를 알고 군사를 물렸다. 그 뒤 사신을 보내 금50냥을 주고 피리를 보려고 했다. 뻔한 속셈에 넘어갈 원성왕이 아니다. 왕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잡아떼자 다시 금1000냥을 가지고 와 보기를 청했다. 왕이 모르쇠로 일관한 뒤 일본 사신이 돌아가자 그제야 내황전에 간직했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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