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교수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교수

미국의 부통령(副統領)이라는 자리만큼 묘하고 특이한 직업을 찾기란 쉽지 않다. 대통령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선거를 치르면서 부통령은 대통령 못지않은 국내외적 지명도를 쌓게 된다. 또한 대통령 후보의 지지기반이 약한 지역이 있거나 대통령 후보의 정치 경력이 비교적 짧은 경우, 이를 보완해줄 수 있는 지역 출신자나 정치 경력 소유자는 부통령 후보로서 선거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렇듯 부통령 후보의 높은 글로벌 지명도와 선거 당락을 좌우할 수 있는 막대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당선된 부통령이 갖게 되는 헌법적 권한은 사실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부통령은 총괄하는 행정부처가 없고 행정명령을 내릴 권한 또한 없다. 상원의장직을 겸직하는 관계로 상원 표결에서 가부동수(可否同數)가 나올 경우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를 던질권한이 있으나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결국 대통령 유고시에 대통령직을 승계 받는 ‘예비 타이어’로서의 역할이 부통령직의 유일한 헌법적 존재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아무런 힘도 없는’ 부통령직을 두고 프랑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의 부통령을 지낸 존 낸스 가너(John Nance Garner)는 ‘막 뱉은 가래침 한 양동이만큼의 가치도 없는’ 자리라고 힐난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극찬했던 미국 정치 드라마 ‘웨스트 윙(West Wing)’에서 부통령이 자신의 역할에 대해 ‘내 헌법적 의무는 맥박이 뛰는 것뿐이야’라고 절규하는 장면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큰 명대사이다.

그러나 미국의 부통령에게 헌법적 권한이 없다고 해서 그가 과연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행정적 책무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부통령은 국정 전반을 관장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대통령이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할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 전국의 유권자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스킨십 소통을 하고, 국가가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해 국민에게 소상하게 설명하고, 각계 인사들을 두루 만나면서 인적 네트워크를 더욱 두텁게 쌓고, 특정 분야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에 대한 효과적 홍보를 할 기회가 그 누구보다 많다. 또한 내각에서 유일하게 해고될 걱정 없이 대통령에게 직언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 이러한 자신의 입지와 활동을 통하여 부통령은 자신의 소신과 포부, 그리고 인간 됨됨이를 그 누구보다 더 효과적으로 국민에게 알릴 수 있고, 이는 ‘미래의 권력’인 차기 대통령직을 거머쥐는 데에 절대적인 어드밴티지를 부여한다. 미국의 부통령은 허수아비가 아니다. 다만 ‘미래의 모든 권한을 갖기 위해 지금은 그 어떠한 권한도 갖지 못하는’, 즉 ‘맥박만 뛰면 되는’ 자리인 것이다.

이번 4.15 총선에서 대한민국 유권자는 보수 야권이 이제 가야 할 길을 선명하게 제시해주었다. 190석을 확보한 범여권을 마주해야 하는 야권이 이제 국회의원들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개헌 저지를 위해 ‘맥박이 뛰는 것’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의도에 있어 봤자 ‘물리적 실력 행사’란 악마의 유혹에만 빠질 뿐이다. 차라리 여의도를 떠나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시민들과 더욱 긴밀히 소통하고 그들이 진정 보수로부터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심성의껏 청취하라. 지역의 젊은 인재들을 발굴하고 그들이 어떻게 국가의 미래에 기여할 수 있을지를 함께 논의하라. 보수가 무엇을 이루기 위해 집권하고자 하는지를 유권자와 함께 고민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 발전의 비전이 담긴 청사진을 제시하라. 미래의 권력을 잡기 위해 지금은 그 어떤 권력도 갖고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무력함에 맞게 처신하라. 이번 총선을 통해 국민이 분명 대한민국 보수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또 거스르려 한다면, 유일하게 남아있는 그 ‘맥박’마저 곧 끊어질 수도 있음을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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