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의 무탈 기원한 부성애 절절

징검다리와 월정교 사이에 문천교 유구가 물에 잠겨 있다.

5월에 봄이 왔다. 개나리 진달래 철쭉 지고 금낭화 모란 작약이 피는 때를 맞고서야 봄이, 주춤주춤 왔다. 겨울의 한가운데서 괴질이 나왔고 맹춘 중춘 지나 여름을 코앞에 둔 지금, 역병은 지구촌을 코로나 한파로 내몰고 있다. ‘오랑캐 땅에는 풀이 없으므로 봄이 되 봄이 아니다’ 했다. ‘코로나 19 한파’는 21세기를 사는 호모사피언스에게서 봄을 앗아갔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게 마련이다. 마침내 정부가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 속 거리두기로 재앙 대비 지침을 하향 조정했다. 5월의 대한민국은 환희와 희망으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코로나의 족쇄를 풀고 미뤄놓았던 숙제를 하듯 밖으로 나왔다. 첨성대 안압지 반월성 계림 월정교가 있는 동부사적지로 몰렸다. 동부사적지 중에서도 월정교는 경주의 새로운 핫플레이스다. 황리단길과 첨성대와 교동마을 월정교 등 동부사적지가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 순례지가 됐다.

문천교와 월정교가 있는 곳은 반월성 남쪽 언덕 아래 흐르는 경주 남천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문천(蚊川)이다. 문천은 모래가 아름다운 강이다. 사금이 많다. 신라의 금관을 비롯한 금장식 공예품이 빼어난 이유를 문천의 풍부한 사금에서 찾기도 한다. 신라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말이 신라팔괴(新羅八怪)다. 그중 하나가 ‘문천도사(蚊川川倒沙)’다. 문천의 모래가 부드러워 물은 아래로 흐르지만, 모래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문천의 ‘문’자는 모기 ‘문’인데 모기내, 몰개라고도 불린 데서 비롯됐다.
 

월정교 아래를 흐르는 강이 문천이다. 지금의 남천.

△‘문천교‘ 원효와 요석공주를 잇다

1986년 2월 월정교 복원을 위한 석재조사를 벌이던 문화재 관리국 조사 담당자는 월정교 하류 19m 떨어진 지점에서 뜻밖의 목조교각 부재를 발견하고 아연실색했다. 이 발견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문천교와 월정교가 같은 다리가 아닐까 했었다. 그해 3월 44일 동안 목교 유구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결과 교각은 너비 7m 내외, 길이 63m 이상이며 목교 특성상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현장에서 삼국시대의 ‘둥근 밑의 토기항아리’ 등이 수습된 것으로 보아 건축 시기는 통일신라 이전으로 추정했다.

경주향교는 원효와 요석공주가 사랑을 나눴던 요석궁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속의 문천교는 불과 34년 전 이렇게 불쑥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1천년 이상 세상의 화젯거리가 되는 원효와 요석공주의 스캔들을 한층 실감 나게 만들었다. 원효와 요석공주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삼국유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원효가 어느 날 거리에서 미친 듯이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주려는가? 내가 하늘을 받들 기둥을 찍어내리라”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였는데, 태종이 듣고서 말하기를 “이 스님께서 아마도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겠다고 말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그보다 더한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때 요석궁(지금의 학원學院이 이곳이다)에 홀로 사는 공주가 있었다. (왕이) 궁중의 관리를 시켜서 원효를 찾아서 데리고 들어오라 하였다. 궁중의 관리가 칙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려고 하는데, 벌써 (그는)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사천泗川이나 세간에는 연천年川 또는 문천蚊川이라 하고, 또 다리 이름을 유교楡橋라고 한다)를 지나고 있어 만나게 되었다. (원효는) 일부러 물에 떨어져 옷을 적셨다. 관리는 스님을 궁으로 인도해 옷을 갈아 입히고 말리게 하니, 이 때문에 (그곳에서) 묵게 되었다. 공주가 과연 태기가 있어 설총(薛聰)을 낳았다.”『삼국유사』 권4 의해5 원효불기

원효가 다녀간 그 길 위에 서다

원효(617-686)는 의상(625~702)과 함께 한국 불교사와 사상사에서 절대적 위치에 있다. 의상은 신라의 귀족 ‘셀럽’인데 비해 원효는 ‘듣보잡’이었다. 타고난 신분의 한계가 원효를 대중불교의 길을 걷게 했다. 활달무애, 거칠 것 없는 자유인이다. 천촌만락에서 노래하고 춤을 췄다. 무애춤이다. 기생집에 드나들고 거문고를 타며 놀았다. 이 같은 기행으로 무지몽매한 이들이 부처님의 이름을 알게 됐고 누구나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원효의 파격적 행보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요석공주와의 만남이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주려는가? 내가 하늘을 받들 기둥을 찍어내리라’는 노래는 지금 들어도 얼굴이 화끈해지는 ‘19금’이다. ‘자루 빠진 도끼’는 여자의 성기를 말하는 게 아닌가. 과부 처지인 요석공주를 겨냥한 노골적인 성적 추파가 아닌가. 그러면서 그 도끼를 ‘빌려주려는가’라고 선을 그었다. 원효는 요석궁에서 3일간 지내다 떠났다고 한다. 말하던 대로 빌려 쓰고 미련 없이 떠났다. 요석공주는 ‘하늘을 받들 기둥’ 설총을 낳았다. 요석궁은 현재 경주향교와 최부자집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은 요석궁 자리로 두 곳을 모두 지목하고 있다. 이 때가 원효의 나이 37세에서 43세 사이였다. 이로써 원효는 무열왕의 사위가 됐고 김유신과는 동서가 됐다. 요석공주는 무열왕의 셋째 부인 영창부인 보희의 딸로 추정된다.
 

경주의 관광 핫스팟으로 꼽히는 월정교.

△충담사 ’월정교’를 건너 경덕왕을 만나다

월정교는 경덕왕 19년(760)에 일정교와 함께 준공됐다. 삼국사기에 기록이 나온다. 길이 63m, 너비 13m, 높이 6m 규모다. 현재의 월정교는 1984년에 발굴조사에 들어가 2018년에 준공했으니 조사와 복원까지 34년 걸렸다. 삼국유사에는 월정교에 관한 기록이 없다. 세상 사람들이 월정교를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을 맺어준 오작교라고 떠들어 대지만 원효가 요석공주를 만나기 위해 다리를 건너간 시기는 월정교가 건축되기 약 100년 전 일이고 무엇보다도 그 다리는 월정교에서 19m 하류에 있는 문천교였다. 월정교는 충담사가 경덕왕을 만나기 위해 건너갔던 다리로 추정된다. 왕이 궁궐의 서쪽 출입문인 귀정문에 있었고 3월 삼짇날에 남산 삼화령에서 미륵세존에게 차를 공양했던 충담사가 왕을 만나려면 귀정문으로 연결된 월정교를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월정교 안에서 본 선도산.

3월 3일 왕이 귀정문 누각 위에 나가서 주위의 신하들에게 일렀다. “누가 길거리에서 고승 한 분을 데려올 수 있겠는가” 하였다. (…) 또한 승려가 있었는데 납의를 입고 앵통(삼태기라고도 함)을 진 채 남쪽으로부터 왔다. 왕이 보고 기뻐하며 누각 위로 맞아들였다. 왕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물으니 승려는 “충담입니다”라고 하였다. “어디에서 오십니까”라 하니 승려가 말하길 “저는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다려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올리는데 지금도 올리고 돌아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짐을 위하여 ‘안민가’를 지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승이 곧바로 칙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바쳤다.『삼국유사』권1 기이2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안민가의 핵심 내용은 후렴구에 있다. ‘왕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다. 『논어』의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경덕왕이 충담사를 귀정문 문루에 초청한 때는 765년 왕이 죽던 해다. 왕은 왜 죽기 전에 충담을 불러 ‘안민가’를 짓게 했을까.

답은 아들 혜공왕에게 있다. 경덕왕은 자식을 얻지 못해 걱정이 많았다. 첫 번째 부인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하자 그녀를 내보내고 만월부인을 맞는다. 만월부인은 어렵게 아들을 낳았다. 16년 만에 얻은 자식이 혜공왕이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자신이 여자인 줄 안다. 여자아이 놀이에만 골몰했다. 그 아들이 이제 8살인데 즉위해야 할 처지다. 죽을 때가 된 경덕왕으로서는 자식의 앞날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찬기파랑가를 지어 문명을 떨치던 충담사를 활용하기로 했다. 신하와 백성의 충성심을 유도하는 노래를 만들어 아들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일 말고는 아비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혜공왕은 8살에 즉위했고 만월부인이 섭정을 했다. 재위 16년간 5번의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을 진압한 김양상과 김경신이 창을 거꾸로 돌려 반란을 일으켰고 혜공왕은 죽었다. 김양상은 왕위에 올랐으니 선덕왕이다. 경덕왕이 충담사의 안민가를 통해 아들의 무탈을 기원했던 경덕왕의 소박한 소망은 허사가 됐다. 그래도 그 덕에 몇 수 안 되는 향가 하나는 건졌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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