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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오디세이] 5. 백률사
[삼국유사 오디세이] 5. 백률사
  • 김동완 역사기행작가
  • 승인 2020년 05월 13일 19시 40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5월 14일 목요일
  • 1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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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 목숨 바친 젊은 순교자, 한반도에 불교 정착시키다
백률사 대웅전.

527년,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 남경에 왔다. 달마는 양무제와 문답을 하다가 수가 틀어져 낙양으로 갔다. 숭산 소림사에서 면벽 수행을 하면서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가 됐다. 중국 불교는선종 중심으로 체질을 변화시켜 나갔다.

달마가 남경으로 왔던 그해에 신라의 이차돈(異次頓)이 불교를 일으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불교국가를 염원하는 법흥왕을 위한 일종의 종교 쿠테타였고 신하들의 반대를 잠재우기 위한 친위 쿠테타였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머리가 하늘로 솟은 뒤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졌다. 목이 떨어진 자리에 절을 세웠는데 자추사(刺楸寺)다. 자추사는 백률사로 추정된다. ‘가시(刺)가 있는 호두(楸)’가 ‘밤’이라는 뜻이므로 ‘백률사’와 같은 이름이다. 이차돈 순교 사건을 계기로 신라에서 불교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신라는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체제를 만들어나갔다.

『삼국유사』 「흥법」 ‘염촉멸신’ 이야기를 요약했다. 성은 박이고 자는 염촉이다. 박염촉과 이차돈은 같은 사람이다. 22세였고 사인 벼슬을 했다. 할아버지는 아진종으로 습보갈문왕의 아들이다. 왕이 절을 세우고 싶어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가 심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이차돈이 왕에게 절의 건축이 늦어지는 죄를 물어 자신을 참수하라고 건의한다. 차돈의 뜻은 받아들여졌다.

헌강왕 때 백률사에 세웠던 이차돈 순교비. 경주박물관 소장

신하들이 모인 가운데 차돈의 목을 베자 흰 젖과 같은 피가 3m 정도 솟구쳤다. 사방이 침침해지고 석양빛이 어두워졌으며 땅이 진동하고 하늘에서 비가 꽃처럼 나부끼며 떨어졌다. 샘이 갑자기 마르고 물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뛰어올랐으며 곧은 나무가 먼저 꺾이고 원숭이들이 무리 지어 울었다. 차돈의 머리가 날아가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졌다. 목이 떨어진 곳에 장사지냈는데 부인이 좋은 땅을 점쳐 절을 짓고 이름을 자추사라 하였다.

경주의 금강산이 오리지널이다

백률사 위에 있는 금강산 정상.

금강산은 이차돈의 일이 있기 전에 이미 신라의 성산이었다. 신라 왕경 오악 중 북악이다. 화백회의가 열리는 신라왕경 사령지(四靈地) 중 하나다. 산의 남쪽 끝에 있는 표암봉은 경주 이씨 시조인 알천 양산촌장 알평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다. 설씨의 시조인 명활산 고야촌의 호진도 하늘에서 금강산으로 내려왔다. 신라 6부촌의 촌장 가운데 2촌장의 탄생설화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이 산이 금강산이 된 데는 이차돈의 순교사건 무관치 않아 보인다. 금강은 다이아몬드다. 굳고 단단하며, 날카롭고 밝다. 인간 내부에 도사린 미혹과 욕망의 뿌리를 잘라내는 지혜, 용기를 불교는 금강석에서 찾으려고 했다. 인간에게 내재한 어둠의 그림자를 지우고, 밖으로 끌어내는 것을 ‘금강심’이라 하고, 지혜와 법을 밝히는 경전을 《금강경》이라 했다. 『신화엄경』 ‘바다 가운데 머무는 곳이 있으니 금강산이라 한다. 예로부터 제불보살중(諸佛菩薩衆)이 그 안에 머문다’고 했다.

경주의 금강산은 세월이 흘러 북한의 금강산에게 이름을 내주고 ‘소금강산’으로 내려앉았다. 북한의 금강산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썼던 1145년까지만 해도 상악(霜嶽·삼국사기, 잡지 제1 제축, 소축)으로 불렸다. 상악이 금강산으로 둔갑해 등장하는 때는 14세기 고려 후기 안축이 쓴 『근계집』과 최혜의 『졸고천백』 이곡의 『가정집』 등에 소개되고 있다. 주객이 전도됐다. 북한의 금강산은 경주 금강산의 표절판에 불과하다. 경주의 금강산이 원조 금강산이다.

굴불사지 사면석불.

금강산은 경주 동천동과 용강동에 걸친 도심에 있다. 경주시청에서 동쪽으로 걸어서 5분 거리다. 해발 177m의 나지막한 산인 데다 소나무 도토리나무 등이 숲을 이뤄 시민들이 즐겨 찾는 국립공원이다. 백률사로 가는 초입은 양쪽에 늘어선 소나무 상수리나무가 터널을 이뤄 상쾌하다. 숲 입구에서 50m 정도 들어가면 사면석불이 나온다. 굴불사지(掘佛寺址)다. “경덕왕이 백률사에 납시어 산 아래 이르렀을 때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사람을 시켜 파보니 큰 바위가 나오는데 4면에 사방불(四方佛)이 조각돼 있었다. 그 자리에 절을 짓고 굴불사라 했다.” 『삼국유사』 「탑상」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

굴불사지를 지나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면 5분 못미처 백률사 대웅전이다. 작은 절이다. 일주문도 사천왕상도 없다. 계단 끝에 작은 마당이 펼쳐지고 왼쪽으로 종각이 들어서 있다. 종각 옆에는 요사채가 옆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요사채 옆면에 사찰현판이 붙어있다. 정면에 대웅전이 대웅전 뒤에 삼신각이 있다. 좁은 땅에 사찰의 기능을 차질없이 수행하도록 오밀조밀하게 공간배치를 잘했다. 사찰계의 ‘땅콩주택’이라고나 할까.

부례랑과 만파식적 백률사로 돌아오다

백률사에는 소중한 문화유산이 몇 점이 전해온다. 817년 헌강왕 때 이곳에 세운 이차돈 순교비다. 높이 1.04m 각면의 너비가 29㎝인 육각돌 기둥이다.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묘사했다. 땅에는 머리가 떨어져 있고 머리가 떨어져 나간 목에서는 피가 치솟고 있다. 명문 중 ‘경중백유일장(頸中白乳一丈)’은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이차돈 순교비는 1914년 당시 고적보존회에 옮겨 진열했다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백률사 금동불입상. 경주박물관 소장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상은 국보 제28호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불국사의 금동비로자나불, 금동아미타불과 함께 신라 등신대 3대 불상으로 꼽힌다. 불국사의 두 불상은 좌상인 데 비해 백률사 불상은 1.77m 크기의 입상이다. 백률사 대웅전에 있었으나 1930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이견대가 만파식적의 재료인 대나무를 얻은 곳이라면 백률사는 잃었던 만파식적을 되찾은 곳이다. 신라 제32대 효소왕(孝昭王·재위 692~702) 때 일이다. 692년 효소왕이 부례랑을 국선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다음 해 3월 부례랑이 말갈족에게 잡혀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천존고에 넣어둔 나라의 두 가지 보물 만파식적과 가야금이 없어졌다.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왕이 1년 세금을 현상금으로 내걸었다. 부례랑의 부모는 아들 걱정에 백률사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여러 날을 정성을 다해 기도했다. 부례랑이 불상 뒤에 와 있었다. 만파식적과 가야금은 향을 피우는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부례랑은 탈출과정에 스님의 도움을 받았는데 만파식적을 타고 바다를 건너왔다. 와 보니 백률사였다. 탈출은 도와준 그 스님은 백률사 관세음보살의 현신이었다.

왕이 만파식적을 ‘만만파파식적’으로 격상시켰다. 절에 시주를 듬뿍 하고 사면령을 내려 죄인을 석방하고 백성들에게 3년 동안 세금을 감면해줬다. 자신이 부처님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온 천하에 널리 홍보하는 효과를 얻었다. 삼국통일 이후 외부의 적은 사라졌으나 여전히 진골귀족은 왕에게 위험한 존재였다. 효소왕 재위 기간 중 지진, 적조, 해일 같은 불길한 자연현상이 일어났고 재위 9년 차에는 이찬 경영이 반역을 꾀하다 처형당했다. 효소왕은 아버지 신문왕의 만파식적에 백률사 관세음보살의 신묘한 능력을 접목시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활용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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