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증오와 상처만 가르쳤다.” 얼마 전 이용수 할머니가 기자회견에서 한 말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30년 동안 일제 침략과 강탈의 역사를 온몸으로 알리기에 힘써온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그 충격이 더 컸습니다. “여태 우리는 잘못된 길을 걸었다.”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단체의 회계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진영 간 갑론을박, 이전투구(泥田鬪狗·진흙탕 개싸움)가 한창입니다만 사실 돈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할머니의 “증오와 상처만 가르쳤다.”는 말씀에 담긴 의미입니다. 그 한 말씀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십 년 전 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는 책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유학자(儒學者)인 일본인 저자는 한국에서 8년간 유학 생활을 한 경험을 토대로 한국의 문화 현상을 일관되게 이기철학으로 해석해 냅니다. 그가 보기에 한국은 아직 공자(孔子)의 나라입니다. 그의 철학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주로 비판적인 논조 위에서 이루어지는 그 ‘해석’들은 대개의 경우 ‘극히 일부(우연)를 보고 전체(인과)를 유추해내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의도가 너무 앞선 결과이기도 하고 ‘된장 맛을 처음 본(처음 이론에 눈뜬)’ 아마추어들이 흔히 보이는 행태이기도 합니다. 초심자들은 흔히 대상을 자기가 원하는 ‘의도’ 안으로 가져옵니다(의도의 오류). 모든 음식 맛을 ‘된장 탓(덕)’으로 돌리고 그렇게 해서 또 자기의 ‘된장’을 설명합니다(순환논법의 오류). 수없이 많은 예 중에서 가장 실소를 짓게 했던 것이 한국인의 ‘도덕에 종속된 연애관’이었습니다. 한국의 드라마를 보면 연인들이 헤어질 때 꼭 도덕적인 비난을 상대에게 퍼붓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본 드라마가 ‘사랑과 야망’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요즘 인기 있는 ‘부부의 세계’는 아니겠네요), 떠나는 남자에게 도덕적인 비난을 퍼붓는(“너는 나쁜 놈이다”) 장면이 아주 ‘웃겼다’는 겁니다. 사랑을 하다가 헤어지는 마당에 굳이 ‘도덕’이 왜 개입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겠다는 거였습니다. 그게 결국은 조선시대 이래의, 공자님의 영향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게 그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한국은 아직 조선이라는 겁니다. 참 ‘된장’ 같은 ‘소리’입니다(그는 ‘말’이 안 되는 것을 한국인들은 꼭 ‘소리’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 것이 다 ‘개인차’고 ‘문화적 차이’라는 건데, 거기다 ‘된장 덩어리’ 하나를 풀어서 일괄, 엉뚱하게도 ‘정상과 비정상’의 논리로 환치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자기 표 ‘된장 국’ 하나로 끓여냅니다. 모두 증오와 상처가 만들어낸 억지 논법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그 비슷한 ‘된장국 끓이기’를 많이 해 왔습니다. 일례로 일본 문화를 ‘축소 지향의 일본인’이라는 말로 요약한 적도 있었고, 한중일의 정원(庭園)을 ‘적당, 과대, 과소’로 비교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일본인의 정교화 취향은 특별한 것이 맞습니다. 제품 하나하나에 들어가는 장인적 정성은 정말 대단하지요. 그것은 그들의 우월한 특성입니다. 그 결과 ‘정교한 작은 제품’들이 눈에 많이 띤다고 해서 그들은 일괄 ‘축소 지향의 일본인’으로 몰고 가는 것은 올바른 설명의 자세가 아닙니다. 한중일의 정원을 ‘적당, 과대, 과소’로 비교하고 싶은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인은 허풍쟁이고 일본인은 본디 작은 인간이라는 선입견이나 회피의식이 개입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원은 자연의 지형지물을 잘 활용하는데 일본의 정원은 드러내 놓고 인공을 추구한다는 식의 이항 대립은 아주 위험한 발상입니다. 정원을 만들 때 주제를 먼저 고려할 수도 있습니다. 자연 그대로를 즐길 것이 아니라면 주제 표현의 의지는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을 지나친 인공의 개입이라고 말한다면 결국 “나와 다른 것은 모두 틀린(저급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제 ‘된장들’의 시대를 끝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증오와 상처만 가르치기’가, 자기 새끼를 잡아먹는 어미 새처럼, 미래를 확실히 망치는 가장 쉽고 큰 범죄라는 것을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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