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여운 남기는 깊은 안목으로 지역 사진예술사 꽃 피워

박원식

1980년 초반, 필자가 그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친분이 있는 모 선생님께서 전시회에 사용할 유화 액자를 찾으러 가신다는 말씀을 듣고 따라 나섰던 기억이 있다. 튼튼하면서도 심플하게 잘 만드시고 또한 저렴하다는 이유로 자주 의뢰한다고 하셨다. 중앙동(현 중앙우체국 뒤편)에 위치한 허름한 한옥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집 한 켠에 마련된 장소에 여러 가지 제작 도구며 먼지가 쌓인 목재들, 그리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완성된 액자들이 뒤섞여 있는 공간에서 나이가 훨씬 넘기신 중년의 젊은 노인이 계셨다. 큰 눈망울에 선하게 보이시는 어른께서 반갑게 맞이하면서 액자에 대해 말씀을 나누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이 분이 바로 박원식 선생이셨다. 그는 손재주가 남달라 생계 수단을 위해 그림 액자를 만드셨던 것이다. 이후 박원식은 문화예술 행사가 이뤄지는 오픈식 날에는 항상 깔끔한 양복 차림으로 참석하시어, 후배들을 격려하던 모습이 생전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박원식은 서울 출생으로 6·25전쟁으로 우리지역에 피난 와서 정착했다. 사진은 대구의 구왕삼과 최계복에게 사사 받았다. 1954년 포항사우회와 1965년 포항사진협회를 창립했다. 1968년 제1회 한일친선사진촬영대회 최고상을 수상했고 전국사진공모전에 120여점이 입상했다. 1975년, 1987년, 1990년 포항사진협회지부장을 역임했고, 1989년 경북사진협회초대회장을 지냈다.

 

 

박원식과 박영달

 

2003년 2월쯤이었다. 필자가 대백갤러리에 근무하던 시기였는데, 박원식이 전화 연락을 주었다. 시간이 되면 당신의 자택에 꼭 방문해 주기를 원하시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죽도동에 위치한 자택에 방문했는데 병색이 짙은 모습과 거동이 불편하신 상태에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여러 가지 힘들어하시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필자를 위해 중국요리를 배달시켜 같이 점심을 먹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生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을 감지하셨는 듯, 삶의 마지막인 전시회를 열어 달라는 부탁의 말씀을 하셨다. 예술가로서의 생을 마감하고 흔적을 남기고 싶은 강한 의지가 보이셨던 것이다. 그는 그동안 사진인들의 도움 속에서 겨우 생계를 이어가던 상황이었다. 이 시기에 포항 사진인들은 박원식의 병환 소식으로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안타까움과 그동안 선생께서 우리지역 사진예술에 대한 공로를 생각해 전시회를 마련해 주어야 된다는 당위성의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던 터였다. 개인전을 한 번도 열어 보지 못한 선생의 소원을 실현 해 주기로 주변인들의 의지가 급속도로 모아 지고 추진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동안 평생을 바쳐 작업한 필름이 관리 소홀로 거의가 소실되었고, 그나마 몇 점 안되는 일부 사진도 보관이 잘 되어 있지 않아 전시회가 불가능 할 정도로 심각했다. 보관하고 있는 작품이라곤 선생께서 취미 활동으로 그리신 유화 작품 몇 점이 전부였다. 그러나 포항사진지부, 포스코사진동우회, 포항사진연구회가 주축이 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선생의 필름을 간신히 재생해 사진 작품으로 어렵게 재현해 전시회가 가능해졌다. 2003년 대백갤러리에서 사진 10점, 그림 7점으로 전시회 오픈을 했다. 55년 동안 포항에 정착해, 적지 않은 작품을 제작했지만 진작 죽음을 앞두고 처음이자 마지막 전시회의 작품 수는 17점이 전부였다. 그것도 사진 작품이 고작 10점이었다. 이마저도 현재는 모두 소실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첫 전시이자 마지막인 팜플렛 자료가 박원식의 모든 것이자 유일한 삶의 흔적으로 남기게 된 것이다.

 

 

장기면 계원리 해녀

 

박원식은 문화예술에 대한 안목이 상당한 수준이셨다고 원로예술인들은 말들을 한다. 서울에서의 약력을 보면, 1947년 제1회 전국군관민친선 사진촬영대회 입선과 1945년 서울 명륜서양화연구소 3년, 1947년 성북회화연구소 1년 수업, 제1회 앙데팡당 미술전 가작 수상을 보면 사진보다는 오히려 그림에 대한 열정이 컸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해방 후의 미술 활동은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되어 그만 두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생계 수단을 위해 사진을 선택했을 것으로 생각 된다. 이것은 1981년부터 박원식이 포항일요화가회 정기전에 22년간 꾸준히 미술작품을 출품 했던 것을 보아 짐작되는 부문이다.

1965년 포항사진협회가 결성되었다. 지역에서 사진협회가 일찍 결성하는 데에는 선각자인 박영달과 박원식의 공로 덕분이다. 이 두 사람을 묶어 준 것은 6·25 한국전쟁이었다. 박원식은 6·25 전쟁으로 포항에서 생계를 위해 사진 DP점인 가게를 열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박영달이 박원식 가게에 자주 들름으로서 늦은 나이에 사진예술에 입문하게 된 동기를 부여해 준 것이다. 따지고 보면 사진에 대한 지식과 정보는 박원식에 의해 포항사진예술사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두 사람은 기본적으로 대도시에서 접해본 문화예술에 대한 깊이 있는 안목이 있었고, 서로의 관심 분야가 일치했기에 가능했다. 이들은 사진으로 친밀감과 우정을 쌓아 나갔고, 지역 사진예술사를 창립하고 또한 격상시키고 저변확대에 많은 역할을 했다.

 

팜플렛

글보다 더 진한 여운을 남기는 박원식의 사진은 아무런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그 시절 사람들의 생활과 어려윘던 상황을 이해하고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대백갤러리에서 전시된 박원식의 1950년대의 해녀들의 사진들은 우리 지역 시대적인 현실을 ‘기록’이라는 차원에서 리얼리즘에 충실하려는 태도를 잘 보여준 작품이다. 1950년대 해녀들의 복장과 주변의 풍경 모습에서 우리 지역 바닷가의 일상을 엿 볼 수 있고, 빛과 어둠이 확연히 대조되는 해녀들의 표정과 포즈에서 내일의 건강한 모습을 담고자 하는 소박한 역사를 기록함으로써, 박원식이 추구하던 리얼리즘의 예술관을 엿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지역원로문화예술인들은 박원식에 대해 평하기를, 말 없고 조용한 어른이었으며 사진예술을 리드하셨다고 했다. 비록, 박원식이 6·25 전쟁으로 포항에 정착한 후 생업에 떠밀려 예술적인 성과는 만개하지 못했지만, 포항사진협회 창립과 저변확대, 그리고 지도교사 생활 속에서 우리지역 사진예술의 꽃을 피워냈다는 점에서 그는 들국화처럼 향기를 가진 선각자이다. 이제는 박원식의 흔적은 단 한번의 전시회에서 남긴 얇은 팜플렛이 전부인 것으로 짐작된다. 포항의 사진예술사에 소리 없이 단단한 그릇을 만들어 낸 박원식의 노력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고 또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박경숙 큐레이터·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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