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완 역사기행작가

경주에 있는 나지막한 산에 대한 이야기다. 평소 무심히 지나친 분이라면 ‘그 산이 그 산인가’하고 무릎을 칠지도 모르겠다. 경주시청 네거리에서 동쪽으로 세 블록 거리에 있다. 용강동 근화여고 뒤에서부터 동천동 석탈해왕릉까지 이어지는, 국도 7호선에 붙어있는 해발 177m의 작은 산이다.

이 산의 이름은 ‘소금강산’이다. 예전에는 금강산이었다. 추정하건대 신라시대부터 일제 강점기 전까지 1천 년 이상 금강산이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소금강산으로 내려앉았다. 신라 6부 촌장 중 경주 이씨의 득성조인 알천양산촌장 알평과 설씨의 득성조인 명활산 고야촌의 호진이 탄강했다는 설화가 전해오고 신라 왕경 오악 가운데 북악에 해당하는 산이다. 화백회의가 열리던 네 곳의 신령스런 땅, 4영지 중 한 군데이기도 하다.

금산이었다가 금강산으로 이름을 바꾼 데는 신라 법흥왕 때 불교진흥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차돈의 순교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처형당한 이차돈의 머리가 떨어진 곳이 이 산꼭대기이고 그 근처에 세운 절이 백률사다. 지금 백률사가 있는 자리다. 『삼국유사』 ‘염촉멸신’조는 이때부터 이 산을 금강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산이 금강산이라고 증언하는 기록은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와 ‘백률사’에서도 보인다. 『해동고승전』에도 나온다.

금강산은 담무갈이라는 보살이 1만2000명의 권속과 함께 사는 바닷속의 산이다. 금강산 1만2000봉이 여기서 나왔다. 신라인들은 이차돈의 머리가 떨어졌던 금산을 지상 위로 옮겨온 금강산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백률사, 굴불사 등 많은 절을 짓고 불상과 보살상을 조성했다. 왕이 행차해 기도를 드리고 화백회의를 개최하는 신령스런 땅으로 정했다. 왕경 5악 가운데 북악으로 정하고 제사를 지내며 품격에 맞는 대접을 했다.

강원도의 금강산은 비슷한 시기에 ‘상악’과 ‘개골산’으로 불렸다. ‘삼국사기’가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려 초기까지만 해도 상악, 개골산이었던 이 산은 원나라 기왕후가 1343년(충혜왕 4년) 내탕금을 내려 장안사를 크게 중창하고 해마다 많은 시주를 함으로써 불교의 성지 금강산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고려시대의 안축과 이곡, 최혜 등의 시와 글에서 금강산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뒤 조선을 지나오는 동안 굳건히 금강산으로 자리를 지켰다. 물론 경주의 소금강산도 고려 조선을 거치는 동안 줄곧 금강산으로 불렸다. 18세기에 제작된 팔도지도와 19세기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여러 지도와 서책에 금강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면 경주의 금강산이 무슨 이유로 소금강산으로 내려앉았을까. 박방용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은 지난해 열린 경북일보 주최 경북문화포럼 ‘경주 금강산을 거닐다’ 발표장에서 1915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고적도보’가 처음으로 경주의 금강산을 소금강산으로 표기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제강점기 들어 강원도 금강산과 경주의 금강산을 구분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경주 금강산을 소금강산으로 불렀을 것으로 추정했다.

금강산 산 이름의 본래 주인은 경주 금강산이다. 강원도 금강산보다 수백 년 앞서 그렇게 불렀다. 고려 조선을 거치는 동안에도 소금강산은 금강산으로 불렸다. 그 시대에는 강원도 금강산도 금강산, 경주의 금강산도 금강산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혼란스럽다며 경주 금강산을 소금강산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광복 75년이 지나도록 방치하고 있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땅에서 이 무슨 치욕스런 일인지 모르겠다.

소금강산에 제 이름을 찾아줘야 할 때가 됐다. 마침 신라왕경복원사업이 한창이다. 무너진 다리와 탑을 세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유적지의 제 이름을 찾아주는 일도 가치 있는 일이다. 이게 다 왕경 복원이고 역사 바로 세우기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일이기도 하다. 경북도와 경주시가 나서라. 경주에 소금강산은 없다. 금강산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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