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을 씻다가 달이 우는 소리를 듣습니다

밤을 밥으로 잘못 읽은 모양입니다 달은, 아무래도 몰락한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변기통 같습니다

아내가 없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르겠습니다 속이 시
커멓게 탄 사내에게 고독이란 밥으로 더럽힐 수 없는 쌀의
언어입니다 문득 살이 운다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밤을 밥이
라 썼다 지우고, 쌀을 살이라고 썼다가 지우는 사내의 입이
문밖 나뭇가지에 걸립니다

사락사락 함께 밤을 지새울 여자가 있다면 처녀가 아니었
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불보다 물이 부족한 밤입니다 고물
전기밥통 가득 살이 타는 밤입니다

달이 생쌀 씹는 소리를 듣습니다


<감상> 밥을 지으려고 쌀을 씻으면 고독도 씻겨 나갈 수 있을까. 혼자가 된 사내는 쌀을 씻어 물을 맞추기에는 서툰 모양이다. 먼저 간 아내는 저 달이 되어 지켜보는 것 같다. 밥을 밤이라 해도 좋고, 쌀을 살이라 해도 좋다. 밥과 쌀은 사내의 시간이고 몸일 테니까. 함께 밤을 지새울 여자는 처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말은 물과 불을 잘 조절하는 여인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아직도 쌀을 안치는 물이 부족한 사내는 고독으로 살이 타는 밤을 지새울 것 같다. 언젠가 저 달과 공전 주기가 맞아 물의 수평선을 잘 조절할 날이 올 것 같다.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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