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학강미술관장
김진혁 학강미술관장

필자는 봉강서도회에 입회하기 전인 초등학교 시절, 계산성당 입구의 2층 목조건물에 자리한 계산서예원에서 처음 붓을 잡았다. 서예원장은 죽농竹農 서동균徐東均(1903~1978)선생이고 부원장은 죽헌 현해봉선생 이었다.

몇 달 후 서예원은 여러 사정으로 인하여 문을 닫았다. 대다수 문하생들은 죽농 선생의 자택인 대봉동 291-6번지인, 지금의 대봉초등학교 뒤편 골목의 한옥으로 배움을 청하러 다녔다. 방 2개에 마루 한 개 딸린 선생의 자택은 큰 방은 선생께서 침식과 함께하는 사랑방 공간이고 작은 방은 항상 두 세 사람의 문하생 연습공간이었다.

병약하신 선생은 가끔 한약을 복용하여 어린필자가 약 동자가 되어 화로에 약탕기를 올리고 부채질을 한 추억이 생각난다. 조용하신 성품이어서 한 나절 동안 말씀이 거의 없으셨다. 한 번을 단둘이 있을 때 하신 말씀이 회상된다. “아이가 글씨 써서 뭐할라 하지? 다른 것도 할 것이 많을 텐데…”하고 지나치는 독백의 말씀을 던졌다. 아담한 대청에는 꽃돌 수석이 몇 개 놓여 있었다. 1971년 달성 서 씨 유허비를 달성공원에 건립하기 위해 노산 이은상 선생이 글을 짓고 죽농 선생께서 글씨를 썼다. 이 비문은 한글로 되어있어 당신이 직접 쓰신 한글서체 작품을 마루에서 펼쳐 보였다. 너무 아름다웠다. 비문에 새겨질 한글서체는 한국인의 심성을 담고 있었다. 선생의 사군자와 한문 서체의 작품을 보다가 다양하고 세련된 한글서체의 필의는 “기본에 충실하면 모든 것이 통하는 법이다.”라고 강조하신 보편적 예술론 그것이었다.

죽농 서동균 매난국죽 1969년作. 학강미술관 소장

이 후 죽농 선생은 1978년 봄, 76세를 일기를 영면하셨다. 돌아가시기 전 자신의 서화작품을 집 마당에 거의 불태웠다고 들었다. 700여 점 중 650여 점을 소각하도록 하였다. “작품이란 종이의 상태에 따라 수백 년이 보존된다. 지금까지 남의 손에 들어간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내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라도 정리해서 후세에 남부끄럽지 않은 것들만 남겨라.”고 말씀하시면서 작고 하셨다.

아마 이러한 일로 인하여 소설가 이문열에 의해 명작 ‘금시조’라는 단편소설이 만들어졌다고 본다. 81년에 발표되었다. 소설가 나이 30대 초반에 집필했다고 한다. 처음 이 소설이 TV로 방영되기도 하여 보았다. 소설을 직접 읽고 더욱 놀라웠다. 어떻게 서화의 전문가도 아닌 젊은 작가가 한묵의 정수인 서화이론에 관한 테마를 이렇게 상징적으로 꾸며 놓았나, 하고 감탄 하였다. 그 후로도 몇 번 정독하였다. 이야기 줄거리는 이렇다.

일제강점기 영남의 서화계에 석담과 고죽이라는 두 인물의 서로 다른 서화예술론을 둘러싸고 펼쳐진다. 영남 유학자 후예인 석담은 학문적 교양과 높은 지조를 지키면서 ‘도(道)’의 경지에 도달할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제자인 고죽은 타고난 재능으로 ‘예(藝)’의 세계를 표현하려 한다. 두 사람은 많은 갈등과 고통속에 휩싸이게 되고, 금시조라는 상상의 새를 통하여 서화의 필묵 세계를 보여준다.

이 소설은 대구의 거벽인 서화가 석재 서병오(1862~1936)를 석담으로, 그의 제자인 죽농 서동균을 고죽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금시조 소설을 읽다보면 대봉동의 작은 한옥집 사랑방 창문사이로 햇살이 스며드는 광경이 떠오른다. 어려운 일상 속에 한복을 고이 입고 다소곳이 앉아서 대나무와 난초를 치는 모습도 기억된다.

금시벽해(金翅劈海) 향상도하(香象渡河) 글씨를 씀에, 그 기상은 금시조가 푸른 바다를 쪼개고 용을 잡아 올리듯 하고, 그 투철함은 코끼리가 바닥으로부터 냇물을 가르고 내를 건너듯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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