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만주망명 인사들의 이주와 초기 정착과정은 상당 부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다. 그나마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1845~1914)의 망명 일기가 아니었다면, 상황은 더 심했을 것이다. 아쉬운 대로 그 공백을 메우고 있는 것이 ‘백하일기(白下日記)’이다. 그만큼 소중한 기록물이다.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김대락은 1911년 67세의 노구를 이끌고, 안동 내앞마을 문중 인사들과 함께 서간도 삼원포(三源浦)로 망명하였다. 그 뒤 1914년 12월 작고할 때까지 약 4년 동안 한인사회의 최고 어른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신흥학교의 젊은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 넣어주기도 하고, 자치단체 경학사에 이어 공리회(共理會)를 조직하는데 힘썼다. 또한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는 한인 사회상을 제시하기도 했다. 만주에서의 그의 이러한 행적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망명 일기의 기록이다.

그는 1911년 설을 쇠고 안동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만주로 가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1월 6일(음력) 서울을 떠나면서부터 그는 붓을 들어, 매일의 일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의 기록은 1913년 12월 31일까지 꼬박 3년이나 계속되었다. 그의 일기 앞에는 기록 연도에 따라 ‘서정록(西征錄)’(1911), ‘임자록(壬子錄)’(1912), ‘계축록(癸丑錄)’(1913)이라는 표제가 붙어있다. 학계에서는 이를 아울러, ‘백하일기’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김대락 자신은 1912년 일기를 시작하면서 ‘보망록(補忘錄)’이라고 하였다. 이어 직접 보망록 서문을 쓰면서 “스스로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일기를 쓴다.”고 밝혀 두었다. 그는 만주에서의 하루하루를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고 했지만, 뒷사람이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그 소망대로 ‘백하일기’는 초기 만주망명 한인들의 일상과 항일투쟁 모습을 기억하는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백하일기’에는 낯선 기후와 토질로 인해 겪게 되는 정착과정의 어려움과 중국인과의 관계 등이 드러난다. 중국인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곳 풍속을 따르고, 호적 입적(入籍) 문제도 보인다. 독립운동의 바탕이 될 자치기구 경학사와 신흥학교와 관련된 중요한 정보도 제공하고 있다.

더불어 1911~1913년 사이 서간도에서 활동했거나 잠시 머물렀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또한 매일의 날씨와 음식, 물가, 가족의 안녕과 약 처방 등 이주 한인들의 일상도 잘 드러난다. 이 모든 기록이 그날그날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백하일기’의 사료적 가치는 적지 않다. 현재 남아있는 다른 기록들이 대부분 뒷날의 회고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기록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4년의 만주 생활 가운데 꼬박 3년 동안 연로한 몸을 이끌고 누군가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록을 남긴 것이다.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고, 독립운동 기지건설의 초석을 놓는데 기여했던 김대락은 1914년 12월 삼원포 남산(藍山) 기슭에서 눈을 감았다.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그의 유해가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 김대락은 세상을 떠났지만 만주에 남은 가족들은 그가 품었던 광복의 뜻을 이어 나갔다. 아들 김형식과 집안 조카 김만식·김정식·김규식(金圭植), 종손자 김성로(金成魯)가 바로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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