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길 선생 독립운동 관련 자료. 국가보훈처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함께 올해 호국보훈의 달 독립운동가로 임병극 선생을 선정했다.

31일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임 선생은 1885년 평안도 출생으로, 1917년 고향을 떠나 북간도(北間島)로 망명해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일원으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대한국민회가 만든 항일무장활동 기관인 국민회군의 제2중대장에 임명돼 독립전쟁의 최일선에서 활동했다.

국민회군은 독립군단과 함께 북간도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효과적인 항일전을 위해 1920년 5월 22일 북간도 독립군 연합체인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탄생시켰다.

같은 해 6월 4일 독립군 유격대는 국내로 진입해 일본군 헌병 순찰대를 격파하는 큰 전공을 세운 후 이틀 뒤 대한북로독군부 주력부대가 주둔해 있는 왕청현(汪淸縣) 봉오동(鳳梧洞)으로 향했다.

이어 6월 7일 홍범도 사령관의 공격 신호탄에 따라 독립군이 일제히 일본군을 공격했는데, 당시 대한북로독군부 피복과장이면서 국민회군의 2중대장이었던 임 선생도 독립군을 독려해 적극적인 공격을 이어가 봉오동 전투 승리에 공을 세웠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당시 일본군 사망자는 157명, 중상자 200여 명, 경상자 100여 명이었으나 독립군은 전사자 4명, 중상자 2명으로 독립군이 완승을 거뒀다.

봉오동전투는 침략자인 일제에 한민족이 조국광복을 달성하리란 증표를 보여준 독립전쟁의 시발점이 됐고, 임 선생은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도 참여해 전승을 기록했다.

이후 1921년 안도현에서 의용대를 조직해 군자금을 모은 임 선생은 일제의 기관을 기습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으며, 1923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연해주 민족운동계·고려혁명군의 대표 자격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이어 북간도에서 의열투쟁을 펼치기 위해 1924년 2월 8일부터 10일까지 사흘 동안 적기단(赤旗團)·북로군정서의 인사들과 회합을 가졌고,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돈화(敦化)와 연길을 왕래하며 지하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중국군에 포착돼 1924년 9월 연길현 숭례향 대명월구(大明月溝)에서 부하 5명과 함께 체포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임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전재용 기자
전재용 기자 jjy8820@kyongbuk.com

경찰서, 군부대, 교통, 환경, 노동 및 시민단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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