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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기획] 나라 위해 '글러브' 대신 '총' 든 야구소년들
[호국보훈의 달 기획] 나라 위해 '글러브' 대신 '총' 든 야구소년들
  • 김현목 기자
  • 승인 2020년 05월 31일 20시 53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6월 01일 월요일
  • 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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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 학도병…대구상업 故이문조·석나홍·박상호 학생
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장, 숭고한 희생정신 재조명 박차
1950년 6월 청룡기대회에서 우승한 대구상업선수들의 기념촬영. 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장 제공
1950년 6월 청룡기대회에서 우승한 대구상업선수들의 기념촬영. 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장 제공

야구방망이와 글러브 대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든 학도병들의 존재가 알려져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고 있다.

대구상원고의 전신인 대구상업에 다니면서 6·25전쟁에 참전한 고 이문조, 석나홍, 박상호 학생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의 활약상은 1993년 발간된 ‘한국야구사’와 2001년 ‘한국야구인명사전’에 실려 있지만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장은 교육박물관을 개관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찾던 중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알게 됐다.

이들의 활약에 야구가 빠질 수 없다.

6·25 전쟁이 발발하기 일주일 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5회 청룡기대회 결승에서 대구상업은 동래중과 격돌했다.

결승전 진출은 대회 출전마저 불투명한 가운데 거둔 놀라운 성과였다.

결승전에서 이문조가 3루수를, 박상호가 유격수, 석나홍이 우익수로 그라운드를 밟았다.

1950년 6월 청룡기대회에서 우승한 대구상업의 시상을 받는 장면. 시상받는 이가 박상호선수. 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장 제공
1950년 6월 청룡기대회에서 우승한 대구상업의 시상을 받는 장면. 시상받는 이가 박상호선수. 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장 제공

해방 전 고교 야구 최강팀 중 하나였지만 대구상업은 해방 직후 우승권과 거리가 멀었다. 당연히 학교 측은 야구부가 대회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때 야구부를 이끈 김종경 감독이 나섰다.

일본에서 야구를 배운 김 감독은 귀국 후 대구에 자리를 잡았고 대구상업 체육교사로 근무했다.

해방 이후 대구상업 야구부를 사실상 새롭게 출범시킨 것도 김 감독을 빼고 설명할 수 없다. 사재를 털어가며 야구부를 지원했으며 청룡기 출전도 김 감독의 지원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출전한 대구상업은 결승까지 진출했고 동래중을 2-1로 꺾고 우승기를 흔든 기적을 연출해 냈다. 어려운 여건 속에 김 감독의 열정이 선수들에게 이어진 것이다.

1950년 6월 청룡기대회에서 우승한 대구상업선수들이 학교로 돌아왔을 때 재학생의 환영을 받는 장면. 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장 제공
1950년 6월 청룡기대회에서 우승한 대구상업선수들이 학교로 돌아왔을 때 재학생의 환영을 받는 장면. 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장 제공

대회 우승 후 대구상업 야구부는 제2회 학도체육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에 머물렀다.

같은 달 23일 개막한 학도체육대회에서 대구상업은 1회전을 부전승으로 통과한 뒤 25일 동래중과 준결승전이 예정돼 있었다.

선수들의 사기가 높았던 만큼 좋은 성적이 기대됐다. 두 대회 연속 좋은 성적을 거두면 선수들은 한국 야구를 이끌 주역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더욱 높일 수 있었다.

탄탄대로가 예정된 듯 했지만 한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김 감독과 선수들을 가로막았다.

경기 당일 새벽 전쟁이 일어나면서 대구상업 야구부도 곧바로 대구로 내려왔다.

아직 전쟁에 대한 감각이 부족했던 만큼 전쟁 발발 다음날인 26일 대구상업 선수단은 시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전황은 시시각각 불리해졌고 이들은 더 이상 야구 방망이와 글러브를 들지 못했다.

대신 소총과 수류탄 등을 들었고 그라운드 대신 전쟁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이 함락된 뒤 대구도 각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으며 북한군이 남하하자 대구상업 학생들은 ‘용약의용군’, 학도병으로 참전한다.

이문조, 석나홍, 박상호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대로 된 군사 훈련조차 받지 못한 채 학도병이 돼 곧바로 전투에 투입됐으며 이들의 전장은 낙동강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이 뚫리면 전쟁은 사실상 끝나는 만큼 치열할 전투가 이어졌다.

낙동강전투는 50여 일이 이어지는 등 말 그대로 아비규환의 상황이 펼쳐졌고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국군과 유엔군, 그리고 이름 모를 학도병 등의 순고한 희생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다. 낙동강 방어선이 사수되면서 후에 인천상륙작전 등 전세를 완전히 뒤집을 수 있었다.

그러나 피해는 매우 극심했고 이문조, 석나홍, 박상호도 결국 전사해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오지 못했다.

김 관장은 6·25전쟁이 잊히고 있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하고 있는 가운데 이들의 활약을 알게 됐다.

이와 함께 이들을 기념하고 알리기 위해 교육박물관에 ‘돌아오지 않는 야구소년들’를 주제로 이들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당시 이들이 활약한 사진도 확보했다.

학생들의 일을 추적했으며 땅에 묻혀 있던 당시 청룡기 우승기를 찾아낸 사연 등도 들려줬다.

김 관장은 “학생 신분으로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이 정말 많다”며 “이문조, 석나홍, 박상호 학생의 나라를 위한 희생을 지금 학생들도 한번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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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목 기자
김현목 기자 hmkim@kyongbuk.com

대구 구·군청, 교육청, 스포츠 등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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