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화철 한동대 교수
손화철 한동대 교수

비무장 상태로 경찰에 목이 졸려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미국의 흑백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버락 오바마가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10여 년 전, 미국은 노예제도의 원죄를 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었다. 하지만 반복되는 아프라카계 미국인에 대한 공권력의 폭력과 계속되는 트럼프 대통령의 막말로 이제 최소한의 체면도 차릴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자기 지지자들만을 염두에 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쏟아내는 발언들은 피부색으로 동료 시민을 차별하는 미국인이 소수에 불과하다고 믿고 싶은 사람들의 바램을 여지없이 걷어찬다. 피부색은 껍데기에 불과하며 그 안에 사람이 있다는 단순한 진리가 미국인의 마음에 아직 안착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그 인종차별의 어두운 그늘이 우리 사회에도 없다 하지 못하는 현실 또한 우리를 착잡하게 만든다.

껍데기만 보고 본질을 호도하는 저열한 의식은 인종차별에 머물지 않는다. 작금의 사태를 보면 우리가 미국을 민주주의의 본산이자 세계의 리더이며 성공한 국가라 여겼던 것은 껍데기에 대한 평가였던 셈이다. 동료시민을 차별하여 분노를 키우고, 법을 집행하고 시민을 보호해야 할 경찰이 무고한 시민을 죽이며, 평화로운 집회를 보장하지 않고 성경마저 선전의 도구로 사용하는 모습은 민주주의 국가의 이상과 멀다.

이번 일로 분노한 시위대 중 일부가 자행하는 약탈과 방화에 대해 양비론에 빠지는 것 역시 사태의 껍데기만 보는 오류가 될 것이다. 경찰이 죄 없는 시민을 죽인 일이 약탈과 방화로 무고한 피해자를 만드는 일을 정당화할 수 없음은 명확하다. 그러나 일부가 저지른 유감스러운 일들로 이번 시위 전체를 규정하는 것은 이번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는 일이다.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 시위로 최소한의 법적 불평등을 개선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지금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갖가지 제도적 사회적 불평등으로 신음하고 있다. 이들이 지금껏 감수해야 했던 금전적 심리적 손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다가 최근의 약탈과 방화로 인한 손해만 부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만연한 차별과 편견으로 가난과 범죄의 악순환이 반복되어 온 미국의 현실에 눈감고 시위대만 나무라는 것은 피상적이다. 물론 폭력에 동의하거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지만, 섣부른 비판과 비난 이전에 지금까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던 그 광범위한 폭력에 무관심했던 것을 반성하고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려 노력해야 한다.

껍데기에만 집중하는 것 자체가 강자의 논리다. 어느 사회이든 힘을 가진 기득권자들은 사태의 내면과 본질, 맥락과 내용을 무시하고 겉으로 드러난 사실과 형식만을 따지곤 한다.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지 않는 분절된 사실들의 나열, 규칙과 법의 의도를 고려하지 않는 형식논리, 가장 표피적인 결과에 대한 단정적인 판단만으로 사태를 규정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그 이면에는 사태의 맥락을 가능한 감추어 그 표면 아래 숨어 있는 진실과 부조리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려는 음모와 위선이 깔려 있다. 시인 신동엽이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며 경계했던 그 음습한 폭력이다.

속살이 드러난 미국의 모습은 처참하다. 사람 피부 색깔에 그렇게 민감했던 것은 아마도 자기 나라를 그럴듯하게 포장해 온 껍데기에 대한 미련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 미련을 버리고 본질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경주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도 이제 미국의 껍데기를 부러워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균형 잡힌 통찰력으로 스스로의 진짜 모습을 점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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