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전노장' 죽지랑, 아끼는 부하 득오를 위해 수모 견뎌내다

부산성이 있는 오봉산 정상.

죽지랑은 삼국통일 전쟁의 영웅이다. 진덕여왕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등 4명의 왕을 거치는 동안 줄곧 재상을 지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삼국사기』에는 무려 11차례나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김유신의 부사령관으로 여러 차례 전쟁에 출전한 백전노장이다. 진덕여왕 때 집사부 시중을 지냈다. 집사부는 지금의 행안부, 대통령비서실, 국가정보원 기능이 혼재된 막강한 조직이다. 이 조직의 장관이 시중이다. 선덕여왕 때 비담의 난을 제압한 김춘추와 김유신 연합세력이 국정을 장악하기 위해 만든 정부조직이다. 철저히 김춘추·김유신의 사람이기 때문에 앉을 수 있는 자리다.

죽지랑의 아버지 술종공은 우지암 회의에 참석한 인물 중 한사람이다. 우지암(삼국유사에 오지암으로 나온다) 회의는 술종공을 포함해 알천공, 임종공, 무림공, 염장공, 유신공이 6인이 참석했는데 유신을 정치권력의 중심으로 올려놓았다. 죽지랑의 승승장구에는 아버지 술종공과 김춘추·김유신의 정치적 동맹관계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오봉산 정상 능선길에 있는 성벽터.
오봉산 정상 능선길에 있는 성벽터.

세월은 쏜살이다. 죽지랑도 나이가 들어 뒷방노인이 됐다. 김춘추도 김유신도 모두 저세상 사람이 됐다. 수많은 전쟁을 치렀고 그 끝에 삼국통일을 이뤄냈다. 기쁨도 잠시, 삼국통일 이후 정국은 국내문제로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진골도 왕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열리면서 왕들은 진골귀족에 대한 견제와 탄압을 노골화했다. 비담의 난과 김흠돌의 난을 목도했고 김흠돌의 난을 계기로 한때나마 화랑이 폐지돼 병부에 흡수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래도 죽지랑은 국가 공훈이고 원로다. ‘풍류황권’에 이름을 올린 자신의 화랑 조직이 있었다. 풍류황권은 화랑낭도의 이름을 기록한 명부로 추정된다. 이때 풍류황권에 이름을 올린 이들은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조직이 아니라 퇴역한 낭도의 모임, 지금으로 보면 재향군인회쯤일까? 9관등 급간 벼슬을 하던 득오가 매일 출근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공무원까지 파견된 정부 공인 기관으로 보인다.

득오가 열흘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죽지랑은 따뜻한 사람이다. 부하의 무단결근이 오래되자 득오의 집을 찾아갔다가 득오 어머니의 말을 듣고 충격 속에 빠진다. “당전으로 있는 모량부의 익선 아간이 저의 아들을 부산성 창고지기로 데려가는 바람에 급히 달려가느라 하직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당전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부대장이며 아간은 6관등이다. 통일 영웅은 경악했다. 자기 휘하의 낭도를 익선이라는 이름의 ‘듣보잡’이 통보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인사발령을 내고 험준한 산성의 창고지기로 데려간 것이다.

한 인간의 인품과 내공은 모욕을 견뎌내는 수준에서 그 깊이를 알 수 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 죽지랑은 침착했다. 익선이 모량부 출신의 관리라는 게 걸렸다. 김흠돌의 난 이후 세상을 바뀌었다. 신문왕이 난을 평정한 후 역적의 ‘잔가지와 잎사귀’ ‘흉포한 무리를 쓸어’냈다고 담화문을 발표할 정도였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주암사. 현재의 주사암.
의상대사가 창건한 주암사. 현재의 주사암.

김유신가야계 진골귀족세력과 이들의 지지기반인 화랑 출신, 즉 사량부 세력이 괴멸되다시피 했다. 사량부를 몰아낸 자리에 모량부 세력이 밀려왔다. 익선은 모량부의 위세를 믿고 날뛰는 조무래기였다.

죽지랑은 득오가 공적인 일로 갔으니 음식이라도 대접해야겠다며 부산성으로 득오를 찾아갔다. 자기 휘하의 낭도 137명이 위의를 갖추고 함께 했다. 죽지랑은 부산성에서 한 번 더 충격에 빠졌다. 창고지기 일을 본다던 득오가 익선 소유의 밭에서 밭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죽지랑은 득오를 만나 준비해 간 술과 떡을 먹이고 익선에게 득오의 휴가를 부탁했다. 익선은 단칼에 죽지랑의 부탁을 거부했다. 함께 간 137명의 낭도들이 항의하는 등 소동이 벌어졌지만 익선을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이 장면을 지나가는 간진이 목격했다. 간진은 추화군(지금의 밀양군)의 능절조 30석을 성안으로 운반하던 중이었다. 간진은 천하의 영웅 죽지랑이 익선 같은 하급 관리에게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간진이 거두어 가던 벼 30석을 모두 익선에게 주고 죽지랑의 부탁을 들어주라고 했다. 익선은 요지부동이었다. 노골적으로 죽지랑에게 모욕을 주었던 것이다. 이를 본 사지 벼슬을 하는 진절이 말안장을 주었다. 그제야 익선이 득오의 휴가를 허락했다.

이 일은 3개월이 지나 사건화된다. 조정의 화주가 알게 됐다. 화주가 화랑의 우두머리라는 견해도 있고 화랑집단을 관리하는 정부 조직의 관리라는 견해도 있다. 신문왕 때 김흠돌의 난을 평정한 뒤 화랑을 폐지하고 병부에 귀속시켰는데 그때 귀속된 화랑을 관리하던 관직일 수도 있다. 화주는 즉각 익선을 잡아들이려 했으나 눈치챈 익선이 달아났으므로 맏아들을 붙잡아 더러움을 씻어낸다며 성안의 못 속에 목욕을 시켰더니 얼어 죽었다.

왕이 이 사실을 알고 칙령을 내렸다. 모량부 출신의 관리들은 모두 쫓아내고 다시는 관직에 들지 못하게 했다. 승려가 되려는 자는 승복을 입지 못하게 하고 이미 승려가 된 사람은 종과 북이 있는 큰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원측법사가 해동의 고승으로 이름나 있었지만 모량부 사람이었기에 승직을 주지 않았다.

선덕여왕의 지기삼사 중 하나인 여근곡.
선덕여왕의 지기삼사 중 하나인 여근곡.

통일 영웅이 겪은 ‘부산성의 굴욕’은 모량부 출신 관리와 승려들에게 대한 대대적인 탄압으로 마무리됐다. 부산성의 굴욕이 불러온 나비효과다. 이때 왕이 효소왕이다. 효소왕은 6살 어린 나이에 즉위해 17살에 자식도 없이 죽었다. 피살설도 나돈다. 왕의 어머니인 신목왕후가 섭정했는데 정권이 불안했다. 신목왕후는 김흠돌의 난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몸집이 커진 모량부 세력을 견제할 명분을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죽지랑이 당한 ‘부산성의 굴욕’을 사량부와 모량부의 해묵은 권력다툼으로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

김흠돌의 난은 사량부 내부의 권력투쟁이다. 사량부는 김씨왕족과 가야계 김씨가 주축이다. 신문왕은 난이 일어나기 전 이미 사량부의 진골귀족의 수상한 동향을 눈치채고 모량부와 손을 잡고 있었으며 난이 일어나자 즉각 반란군을 진압했다. 사량부는 반역세력으로 몰려 붕괴하다시피 했다. 죽지랑은 나이가 들어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는 않았다. 김유신의 가야계와 손잡고 있던 죽지랑은 숨을 죽이고 살 수밖에 없었다. 모량부의 하급관리가 통일 영웅을 모욕한 데는 이같은 정치적 배경이 작용했을 것이다.

득오는 죽지랑이 죽은 뒤 죽지랑을 사모하는 향가를 지었으니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다.

간 봄 그리워함에
계시지 못해 울면서 시름 하는데
두덩을 밝히 오신 모습이
해가 갈수록 헐어가도다
눈 돌림 없이 저를
만나보기 어찌 이루리
郎이여, 그릴 마음의 모습이 가늘 길
다북쑥 구렁에서 잘 밤인들 있으리.

여근곡 속에 있는 옥문지.
여근곡 속에 있는 옥문지.
김유신이 군사훈련을 하던 지맥석.
김유신이 군사훈련을 하던 지맥석.

부산성은 문무왕 때 건축된 삼국시대 산성이다. 정상은 해발 685m로 오봉산 주사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에 소개되는 여근곡과 옥문지가 있고 산정상 아래에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주암사가 있다. 현재의 주사암이다. 절의 서쪽에는 드라마 선덕여왕 촬영지인 ‘마당바위’가 등산객의 인기를 끌고 있다.

김유신이 군사들과 훈련하던 곳인데 보리술을 빚기 위해 보리를 쌓아두던 곳이라고 해서 지맥석(持麥石)이라고 했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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