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만주에서의 정착과정은 끝날 것 같지 않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국내의 항일지사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불안과 치욕, 저항심은 극에 달했고, 이 때문에 1910년대 경북인의 만주 망명은 계속되었다. 왕산 허위 일가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들의 망명은 1909년 무렵 허학(왕산 허위의 장자)을 시작으로 191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그 배경과 정황은 일창 허발이 쓴 ; 종숙부왕산선생행장발(從叔父旺山先生行狀跋)‘’에 드러난다.

선생(허위)이 계시지 않음에 집과 나라가 함께 무너졌다. 조국이 日敵(일제)에 합병됨에 우리 가족이 자연 廢族(폐족)에 이르렀다. 또 자유가 없어지니 그 비통함을 어찌 차마 말로 다하리오. 동족 가운데도 적이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日人(일인)의 악정 아래 이름을 보존할 방책이 없었다. 종제 허학과 더불어 비밀리에 상의하여 1909년 아우 학이 먼저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로 가고, 1910년 합방된 뒤에 허발이 남부여대하여 아무도 모르게 하룻밤에 출발하니, 고향을 떠나는 걸음마다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이들의 본격적인 망명은 1912년, 1915년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1915년 망명 당시의 정황과 규모는 허은의 회고록에서 확인된다. 이때 망명길에 오른 사람은 허형과 부인 진성이씨, 허형의 장자 허민과 그의 부인 정도정, 둘째 허발과 부인 이산운, 셋째 허규와 부인 이서천 그리고 허발의 장자 허채와 부인 이은기, 차자 허현과 딸 허은, 허형의 동생 허필과 부인 벽진이씨, 그의 아들 허보와 부인 옥산장씨, 다섯 살의 허극(이명 허형식) 등이었다. 뒷날 석주 이상룡의 손부가 되는 허은(許銀)도 이때 망명하였다.

일행은 고향을 뒤로하고 깜깜한 어둠 속을 걷고 또 걸었다. 부상역에서 기차를 탄 일행은 추풍령과 서울을 거쳐 신의주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을 선택한 이들은 배 네 척을 구하고, 소금 친 갈치 몇 상자와 생활용품도 준비했다. 보름 동안의 괴로운 선상(船上) 생활을 끝내고, 회인현 화전에 도착했다.

이어지는 육로 이동도 험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말 스무 필을 세내어 다시 몇 날 며칠을 달려서, 통화현 다취원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4, 5년 전에 망명한 애국지사 10여 호가 살고 있었다. 방 하나 얻어서 10여 일을 한데 우글거리며 기거하였다. 이어 유기호·하재우 등의 안내를 받아 왕산 허위의 유족이 머물던 다황거우로 향했다. 다황거우는 다취원에서도 첩첩산중으로 4km를 더 가야 했다. 도착해보니 왕산 일가는 산비탈의 토굴 같은 집에서 방 두 칸을 겨우 마련하여, 이방 저방 무더기 지어 거처하고 있었다.

이곳 다황거우에서 석 달을 고생하던 허은의 가족은 1916년 20km쯤 떨어진 진두허라는 곳으로 옮겨갔다. 먼저 자리 잡았던 동포들이 중국인의 소작을 주선해 주었던 것이다. 진두허에 잠시 정착했던 허은 일가는 1916년 12월 초순 만리거우를 거쳐, 다시 유화현 우두거우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잠시 안정을 찾았지만, 뒤에도 끊임없는 이주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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