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지난주에 저의 ‘교육철학(1)-전체를 보는 눈’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교육철학(2)-통째로 눈치껏’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머리로 하는 공부든 몸으로 하는 공부든 인간이 하는 모든 공부는 때가 되면 다 괄목상대(刮目相對·학식이나 재주가 놀랍도록 성장함)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당사자는 뼈를 깎아내는 연성의 시간을 보내고 얻은 노력의 결과이겠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깜짝 놀라서 눈을 비빌 정도로(그 사람이 맞나?) 신기한 일이 되는 게 바로 그 경지입니다. 옛날부터 공부의 세계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러니까 괄목상대라는 고사성어도 생긴 것이겠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공부를 하려면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고 비장하게 합격 소감(이 말에는 “죽기 살기로 공부했습니다”라는 함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을 밝힐 정도로 해야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쉬엄쉬엄 하더라도 그저 ‘밥 먹듯이’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 공부의 세계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각기 다른 신체 구조(외모 포함)와 지능을 타고납니다. 신체만 다른 게 아니라 지능에도 여러 가지 지능이 있어서(다중지능) 자신이 타고난 지능을 잘 가려서 집중적으로 연마하면 크게 성공할 수 있다고 많이 이야기합니다. 저는 거기에 하나 더 보태고 싶습니다. 달리기 시합에 비유합니다. 마라톤 지능, 5000m 지능, 100m 지능, 허들 지능 등이 있어서 장(중)기만성형도 있고 단기속성형이나 우여곡절형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공부 하나로(아직 많이 미숙한 인격체이고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을 때입니다) 거의 평생의 진로가 결정되고 마는 우리나라의 학벌주의는 매우 불공평하고 비효율적인 악습적 문화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의(치)학전문대학원이나 법학전문대학원 같은 것이 있어서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교육전문대학원, 행정(외교)전문대학원, 경찰(군사)전문대학원 같은 전문 직업교육 체제가 하루속히 도입되면 좋겠습니다. 시험성적만 가지고 사람을 뽑아 쓰는 게 아니라 최적의 교육을 시켜서 진짜 필요한 인재를 만들어 쓰자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유능하고 유익한 인재들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주고 그에 걸맞게 과감하게 교육적 투자를 해야 할 것입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통째로 눈치껏’입니다.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는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서 하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공부가 가속(加速)을 받아야 할 때도 그런 답답한 행보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문자 그대로 답보(踏步·제자리걸음)에 머물고 맙니다. 눈치껏 달려나가야 합니다. 유추(類推)하고 연상(聯想)해서 가르쳐 주지 않는 것들도 자작(自作) 깨쳐나가야 합니다. 물론 틀릴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오류는 금방금방 잡히게 되어 있습니다. ‘밥 먹듯이’ 공부를 하면 그렇게 됩니다. 사실은, 그런 오류 수정 과정이 진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유용지식을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몸 공부에서 많이 강조하는 백련자득(百鍊自得)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통째로 눈치껏’을 읽기나 쓰기 공부(문해력 테스트)에 적용해서 좋은 가르침을 남긴 이가 연암 박지원입니다. 연암이 ‘소단적치인’이라는 글에서 적고 있는 몇 문장을 예로 들면서 오늘 글의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글을 잘 짓는 자는 아마 병법을 잘 아는 자일 것이다.(...) 제목이라는 것은 적국(敵國)이고, 전장(典掌·전거를 인용하는 것) 고사(故事)는 싸움터의 진지이다. 글자를 묶고 구절을 엮어 문장을 이루는 것은 부대의 대오행진과 같다.(...) 앞뒤 문맥을 서로 맞추는 것은 봉화(烽火)를 드는 일이고, 억양반복이라는 것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이고, 파제(破題)는 성벽을 먼저 기어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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