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규 문학평론가
한정규 문학평론가

최치원 하면 신라시대 학문의 대가이자 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당대의 내놓으라 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특히 그는 최승우, 최인위 와 함께 신라 삼초로 꼽힌다.

그가 열두 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 공부 열여덟 살에 장원급제를 한 인물로 진성왕 때에 골품제 사회의 모순 해결을 위해 시무책 10여조를 올리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나 한쪽으로 기우면 반듯이 탈이 나게 돼 있다.

최치원은 계원필경 20권, 격황소서, 등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신라의 골품제 등으로 국정이 문란 사회가 극도로 혼란하고 중앙에서는 귀족들 간 권력투쟁으로 사회가 혼란에 빠진 것에 크게 반발했다.

골품제로 둘러싸인 왕실을 중심으로 한 귀족들 간 권력쟁탈은 왕실뿐만 아니라 지방 세력에도 크게 영향을 끼쳐 반발이 적지 않았으며 재정 궁핍까지 겹쳐 농민봉기 등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했다.

그걸 못마땅하게 생각을 한 최치원은 벼슬길에서 물러나 유랑 길로 들어서 경주남산, 강주빙산, 합주 청량산, 지리산 쌍계사, 함양과 옥구 부산 해운대 등으로 두루 돌아다녔다.

말년에는 가족과 함께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 가 승려 현준과 친교를 맺고 지냈다. 그때 가야산 해인사 홍륜동계곡으로 들어가 바위에 새겨 남긴 글이 있다. 그 글이 ‘흐르는 계곡 물에다 귀를 씻고 싶다.’ 라고 하는 ‘세이암(洗耳巖)’이다. 뿐만 아니라 일인청산 갱불환( 一人靑山 更不還 ·내 한번 청산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밖에 나오지 않으리라)’는 각오의 글이다.

최치원 그가 남긴 글만으로도 골품제를 중심으로 한 신라왕실이 크게 부패했음을 알 수 있었으며 국가를 걱정한 선비로서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일국의 관리로써 왕실부패정치로 들끓는 국민들의 소리를 따갑게 듣고 안타까워하면서 그 소리를 들었던 귀, 그 귀를 산 꼴 깨끗한 계곡 물로 씻고 싶은 심정을 바위에 새기며 왕실을 비판하고 다시는 산 속 그곳에서 밖으로 나가 벼슬 같은 것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글을 볼 때 참으로 훌륭한 선비였다.

시대가 바뀌고 사회적 상황이 크게 변했다고는 해도 국내외 정세가 극도로 어수선한 이때 최치원 같은 올곧은 사람이 왜? 없을까 그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권력이 좋아서, 벼슬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세상이 너무 어수선하다. 위기에 영웅이 난 다는 말이 있다. 신라가 골품제 등으로 국정이 극도로 문란한 시기에 최치원 같은 학자가 있었던 것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 한반도 북쪽에서는 젊은 남매가 개를 빗 된 말들을 거리낌 없이 하고 70여 년이 넘도록 우방으로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지켜 준 미국이 우리를 불신 하시라도 떠날 것 같은 태도를 보이고 20세기 초 36년 동안 우리를 식민통치를 했던 일본이 지구역사이래 우리 고유영토였던 독도가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을 하는 등 지난 역사를 왜곡하고, 중국은 동북아시아에서의 패권을 위해 우리영토상공은 물론 서해와 남해 우리반공식별구역을 임의로 드나들고 러시아 또한 먼발치에서 동해 우리 영공을 넘보는 등 각가지 행태가 그치지 않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그런 이 때 국내정치도 밝지만은 않으니 실로 불안하다.

이 땅에 또다시 제2의 최치원이 나타나는 그런 잘 못된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고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며 국가 미래를 걱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이 없도록 모두가 일심동체로 국가 미래를 걱정하고 잘해야 한다. 하찮은 것에 사욕을 버리고 대의만을 생각해야 한다. 국가권력은 어느 특정인의 소유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국가 안위 그 책임 모든 위정자들께 있다. 그중에서도 집권여당과 정부 최고책임자이자 최대권력자인 대통령에게 있다. 역사의 죄인이 되느냐 역사상 위대한 영웅이 되느냐는 오직 대통령 자신의 문제다. 위대한 대통령이 되 줄 것으로 믿는다. 이 시대에는 최치원 같은 사람이 필요 없는 그런 세상을 만들 것을 모든 위정자들에게 최치원의 세이암 그 글귀 음미해 볼 것을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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