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영’은 감사(監使)라고도 부르는 지방 수령 관찰사가 지역의 사법·군사·행정권을 쥐고 업무를 본 관저다. 조선 초기 경상도를 관할하던 감영은 경주부에 있었다. 경주를 다스리는 부윤(府尹)이 경상도관찰사이자 경상감사였다.

경상도는 다른 도에 비해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 태종 7년(1407년)에 낙동강을 경계로 우도와 좌도로 나눴다. 낙동강 동쪽은 좌도로 경주부윤이 관할하고, 서쪽은 우도로 상주목사가 맡아 관찰사를 겸했다. 하지만 좌·우 분도가 세금을 걷는데 혼란을 일으키자 한 해 만에 다시 원래대로 환원했다. 대신 경주에 있던 감영을 상주로 옮겨 상주목사가 경상감사를 겸하게 했다.

경주와 상주의 머릿자를 따서 ‘경상도’라는 지명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 경상도 감영은 경주와 상주로 옮겨지다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선조 29년(1596년)에 처음으로 지리적으로 중간 지점인 대구에 청사를 건립한다.

대구시가 424년 전에 세웠던 이 경상감영을 복원하기 위해 옛 대구경북지방병무청이 있던 사적 제538호 ‘대구 경상감영지’ 주변 부지 발굴을 하고 있다. 지금도 경상 감영의 중심 건물인 선화당과 징청각은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발굴 터에 있던 감영의 정문 관풍루(觀風樓)는 1906년 대구읍성이 헐리면서 달성공원으로 옮겨지고, 감영 진입로와 부속 건물들은 일본 헌병대 건물이 됐다가 다시 그 자리에 병무청 건물이 들어섰다.

발굴조사를 맡은 대동문화재연구원이 16일 그간의 발굴 성과를 발표했다. 눈에 띄는 것은 감영의 정문인 관풍루의 위치를 뚜렷하게 파악했다는 점이다. 관풍루의 원래 명칭은 ‘폐문루(閉文樓)’다. 북과 종, 나팔 등 악기를 준비해 두고 매일 밤 10시에 문을 닫았다가, 새벽 5시에 문을 열면서 풍악을 울렸다고 한다. ‘관풍루’란 명칭은 ‘감사가 누각에 올라 세속을 살핀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대구 경상감영공원 일대는 임진왜란 이후 8도의 관아 구성을 잘 보여주는 유적으로 대구의 역사적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문화유적이다. 대구시가 경상감영을 국비와 시비 1410억 원을 들여 2035년까지 복원할 계획이다. 10여 년 뒤에 누각에 올라 대구의 세속을 한 눈에 살필 수 있을지 기대된다.
 

이동욱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논설주간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