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 역사에 ‘태종(太宗)’이라는 이름을 가진 군주가 눈에 띈다. 왕조를 세운 시조에게는 통상 ‘태조(太祖)’라는 묘호(廟號)를 바치고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군주에게는 ‘태종’이란 묘호를 붙였다. 묘호는 종묘의 위패에 적힌 이름이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태종이란 묘호를 받은 군주는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김춘추로 태종무열왕으로 불려 졌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꼽히는 당나라 이세민의 묘호도 태종이었다. 이 두 사람의 태종은 동시대를 풍미했던 위인들이었지만 훗날 같은 묘호 때문에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풍파를 일으켰다.
백제의 잇단 침공으로 신라는 백척간두의 위기에 몰렸다. 김춘추는 왕이 되기 전 신라의 외교를 책임진 귀족으로 당 태종 이세민을 만나 나당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물리치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구축한 명군이었다. 신라 신문왕 때 당나라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태종무열왕의 묘호가 당 태종과 같다며 항의했다.
“우리 태종 문황제께서 신공과 성덕이 천고에 뛰어나 태종이란 묘호를 받쳤는데, 너의 선왕 김춘추에게도 참람(僭濫)되이 같은 칭호를 주었으니 즉각 바꾸라.” “선왕의 칭호가 우연히 성조(聖祖)의 묘호를 서로 범했다니 칙령을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저의 선왕께서도 자못 어진 덕을 갖추고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다스리며 삼한을 일통(一統)했으니 공이 많지 않다 할 수 없습니다. 온 나라의 신민이 애묘의 마음을 이기지 못해 바친 이름이 성조의 묘호에 저촉되는 줄 몰랐습니다. 송구합니다. 바라건대 이대로 황제에게 보고해 주십시오.”
삼국통일을 완성한 아버지 문무왕의 대를 이어 통일신라의 정치적, 사회적 통합에 온 힘을 쏟고 있던 신문왕은 당나라 사신의 요구를 거절했다. 표현은 극진했지만 못 바꾸겠다는 뜻을 분명히 전했다. 사신은 얼굴을 붉히고 돌아갔지만 그 후 다시는 바꾸라는 요구는 없었다.
김여정이 탈북민 전단을 맹비난하자 전단금지법을 만들겠다고 부산떤 정부나 연락사무소 폭파를 협박하자 종전선언을 서둔 여당이나 모두 실제 북의 연락사무소 폭파로 대한민국 체통만 구겼다. 신라의 의연함이 돋보인다.
- 기자명 설정수 언론인
- 승인 2020.06.18 18:18
- 지면게재일 2020년 06월 19일 금요일
- 지면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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