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학강미술관장
김진혁 학강미술관장

작년부터 대구 남문시장에 자주 간다. 필자의 그림 그리는 작업실이 시장 부근의 남산동 인쇄골목에 둥지를 틀어서 점심 식사나 저녁 술자리 때 남문시장 안을 기웃거린다. 최근 재개발로 인하여 어수선하게 된 시장 안을 돌아다니다 1970년대부터 보아왔던 대구원로화가 신석필(1921~2017)의 동서미술학원 자리의 옛 간판이 없어진 걸 알고 아쉬움이 남았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여도 신석필 선생의 남문시장 안 자택과 동서미술학원 간판이 낡은 채로 녹슨 대문에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신석필 선생과의 인연은 1970년대 후반부터이다. 그전부터 동서미술학원을 경영하신 화백은 자신의 개인전시회를 열기 위해 팜플렛 표지에 한자로 ‘申錫弼’ 신석필이라는 성명을 예서체로 써달라고 필자에게 부탁하여 써드린 것이 인연이 되었다.

그 후부터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이신 선생의 작품을 대구의 화랑이나 미술관에서 가끔 볼 수 있었다. 선생을 뵈면 떠오르는 사자성어가 있다. 논어에 나오는 ‘溫良恭儉(온량공검)’ 이다. 온화하고, 선량하고, 공손하고, 검소하고이다. 모든 면에서 후진들에게 모범을 보인 일생을 사셨다. 작고하시기 몇 달 전에 예술인 아카이브 시리즈를 취재하기 위해서 신석필 화백이 거주하시는 남산동 아파트로 직접 방문하였다. 몇 시간 동안 문답을 하며 선생의 일평생 스토리와 지역예술과의 관계에 대하여 들을 수 있었다.

97세 신석필화백과 작업실, 2017년

그의 회고에 따르면 사리원인 봉산군 은파마을이 고향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일본에 유학하고 온 백원주 선생이 어린 신석필에게 영향을 주었다. 일 년 내내 야외 스케치를 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미술의 본격 수업은 해주미술학교에 다니면서였다. 평양국립미술학교를 진학하여 1년간 다녔다. 마침 대학원 과정에 해당되는 수업이 개설되어 이쾌대의 형인 이여성 화가를 만났다고 한다. 그의 배려로 조교를 하는 중 6·25 전쟁이 발발하고 1·4 후퇴 때 가족들과 피난길에 올랐다. 1951년 부산에서 대구로 정착하였다. 피란 온 12명의 화가로 월남화가단을 조직하였다. 멤버는 이중섭, 최영림, 윤중식 도 포함되었다. 대다수 교동시장 근처에 살았지만 화백은 가족들과 함께 남산동 남문시장에 뿌리를 박고 70여 년을 사셨다. 가끔 향촌동에서 서동진, 주경, 정점식, 장석수 등과도 어울려 지냈다. 60년 대와 70년 대 작업에서는 어린 시절의 추억과 고향에 대한 향수, 민족 정서를 느끼는 신화의 세계에 관심을 가졌다.

처음 가진 교직으로는 대구서중학교에 미술교사로 2년간 재직하였다. 이어 왜관 순심중고등학교에 짧게 근무하였고 남산여고에 15년간 재직하다 퇴임하였다. 이어서 영남대학교와 경북대학교에서 실기강의를 오랜 기간 하였다. 인터뷰 중 “그림만 그린다.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그림, 그래서 그림이 나는 좋다. 어떤 유파와 관계없이 그린다. 예를 들면 꿈은 형상이 구체적이지 않다. 하지만 나는 추상으로도 구상으로도 마음대로 그릴 수 있어 늘 즐겁다. 난 그 꿈을 지금도 그리고 있다.” 100세를 앞두신 구십대 후반의 원로화가 신석필은 62회의 마지막 개인전을 연 후 그해 겨울 12월 24일 작고하셨다.

크리스마스 날 영남대학교 장례식장을 찾았다. 항상 자랑하던 현대건축가로 성공한 아들이 보였다. 아들이 나온 유럽판신문을 보여주시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필자에게 좋은 배필을 중매시켜 달라고 말씀하시던 선생의 해맑은 표정이 생각났다. 그의 작업노트에는 ‘모든 예술가는 자신의 자전을 쓰고 그린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 하늘나라에 계신 지금은 북녘땅 황해도 고향에서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계실 것이다. 따뜻하고 밝은 색상으로 작업을 하시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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