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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 롤모델' 포항상륙작전…완벽한 최초의 유엔군 상륙작전
'인천상륙 롤모델' 포항상륙작전…완벽한 최초의 유엔군 상륙작전
  • 손석호 기자
  • 승인 2020년 06월 24일 21시 07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6월 25일 목요일
  • 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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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준비·실시단계까지 삼박자…단시일에 완수한 기록적인 작전
1950년 7월 현 포항여객선터미널(학산방파제)에서 이뤄진 미군의 포항상륙. ‘포항 6.25’에서 사진 발췌.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지휘로 방비 태세가 허술한 북한군 배후를 급습한 6·25 전쟁 전환점 인천상륙작전은 널리 알려져있다.

그리고 이와 양동작전이면서 많은 학도병이 투입, 희생된 영덕 장사상륙작전도 최근 영화화에 이어 이달 초 전승기념관이 개관하는 등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6·25 최초 유엔군 상륙 작전이며 인천상륙작전의 롤모델이 된 ‘포항상륙작전’를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6·25 전쟁 70주년을 맞아 최근 발간된 ‘포항 6·25’에 실린 내용을 발췌 인용하면 전쟁 직후인 7월 초부터 당시 일본에 주둔했던 미군 제1기병사단의 포항상륙작전(1950. 7. 18~22), 작전명 ‘블루하트(blue heart operation)’가 추진됐다.

앞서 전쟁 개시 이후부터 7월 초까지 미군 1만5000명과 1700대 차량 등 군수 물자가 일본에서 부산으로 긴급 투입됐으나, 북한의 대대적 공세로 전황은 불리했다.

돌파구 마련을 위해 맥아더 사령관은 미 해군 극동상륙부대인 제90 기동부대 사령관 도일 소장과 참모진을 도쿄로 소집했다.

‘제1기병사단을 인천이나 군산으로 상륙시킬 수 있는 작전 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

하지만 대전 지구 전황이 빠르게 악화하자, 인천 등 북한군 측면 투입보다 빠른 교두보 확보를 위해 대전 이남 지역에 상륙시킬 필요성이 제기됐다.

부산이 안전하지만 55척 함선이 이미 정박 중이었고, 더 많은 입항 계획이 있어 다른 지역에 투입해야 했다.

도일은 전선과 가능한 한 가깝고 부산과 65마일 거리인 ‘포항’을 최종상륙목표 지역으로 제시, 7월 10일 맥아더의 승인을 받았다.

포항은 유엔 해군 동해안 함포사격 지원에 힘입어 아직 최전선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유지했다.

사용 가능한 영일 비행장, 양호한 정박 환경과 상륙하기 쉬운 1000야드 이상 해안선 등 좋은 조건도 갖췄다.

7월 11~13일 상륙작전에 필요한 해안정보 수집을 위한 참모 등이 포항 영일 비행장에 도착, 수심·장애물 등 상세한 정보를 정찰·수집하고 복귀했다.

15일 포항이 완벽하게 적의 저항이 없는 상태임을 확인하는 등 준비를 마치고 3000여 명 정도의 미 상륙부대가 21척의 LST(landing ship tank·미국의 상륙 작전용 함정·선수문이 열려 선창이나 상갑판에 실은 병력·탱크·물자를 양륙)에 탑승, 요코하마 항을 출항했다.

이 무렵 태풍 그레이스가 필리핀에서 북상하고 있었으나 다행히 한국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17일 등에 진행된 소해(수중 부설 기뢰 제거 등 해군 제반 작업) 작업에서도 기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

18일 오전 5시 마침내 포항 영일만 해역에 도착했다.

5시 58분 도일 장군의 ‘상륙군 상륙’ 명령에 기병사단 중장비 양륙을 시작으로 7시 15분 상륙단정(LCM)을 이용해 병력이 해안으로 집결했다. 9시 30분에는 군수지원물자가 2000대의 차량과 같이 신속하게 양륙됐다.

동해안 경비 함정들은 근해를 호위하면서 안전한 상륙을 지원했다.

19일 포항상륙작전에 동원됐던 15척의 LST는 오후 3시 양륙을 완료한 후 7시 구룡포에 입항했다.

미 1기병사단은 포항에 상륙해 미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 환영을 받은 다음 포항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송 열차와 차량에 탑승해 중부전선으로 무사히 이동했다.

호바트 게이 소장이 19일 정오 지휘권을 인계받았고, 제7기병연대 제1대대를 포항에 잔류시킨 다음 오후 6시께 영덕 방면을 방어하고 있는 국군 해안방어작전을 지원토록 일부 병력을 투입했다.

20일 제9기병연대는 포항역에서 열차를 타고 그날 밤늦게 영동 일대에 도착한 다음 다음날 오전 대전에서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한 미제24사단과 임무를 교대했다.

그리고 22일부터 추풍령을 넘어 김천과 상주 방면으로 진출을 꾀하던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동과 황간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 투입됐다.

공동 저자인 이상준 향토사학자는 “포항상륙작전이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당시 뉴욕·런던 등 많은 외국 언론에 대서특필됐었다”며 “7월 19일 자 AP통신에서는 미 제1기병사단의 포항 상륙 직후, 그 당시에 포항에서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시내 전신주에 걸어 두었던 “‘WELLCOME U.S. ARMY’라는 현수막 사진을 ‘예상하지 않은 환영’이라는 제목과 함께 전 세계에 타전했다”고 했다.

또 다른 저자인 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은 “포항상륙작전은 6·25전쟁 최초의 유엔군 상륙작전이며, 소규모의 상륙작전이었지만 계획·준비·실시단계에서 완벽한 상륙작전의 표본”이라며 “또한 단시일 내에 완수한 기록적인 작전이며, 이후에 인천상륙작전의 롤모델이 되기도 했다”고 작전 의의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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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호 기자 ssh@kyongbuk.com

포항 북구지역, 검찰, 법원 등 각급 기관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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