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병영 설립에 나섰다. 중·일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에게도 참전의 기회가 열릴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 결실로 신흥무관학교에 이은 제2군영으로 백서농장(白西農庄)을 세웠다.

병영 설치는 1914년 가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위치는 몇 가지 설이 있지만 통화현 제8구 팔리초(八里哨) 오관하(五菅下) 소백차(小白?)가 유력하다. 이곳에 빽빽이 들어선 나무를 베고, 정지작업을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난 1915년 봄 무렵 드디어 병영이 완성되었다.

백두산 서쪽 깊은 산속에 자리 잡았다 하여 ‘백서’라고 이름하였고, ‘농장’이라고 불렀지만 사실상 병영(兵營)이었다. 1919년 문을 닫을 때까지 모두 385명의 군인들이 이곳에 입영하였다. 이들은 주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과 신흥학교 분교생이었다. 원병상은 백서농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억하였다.

“이곳은 사람의 발자취가 닫지 않은 밀림지대로써 곰·멧돼지·오소리 등 산짐승이 득실거리는 깊은 산골짜기였다. 이곳에 막사를 짓고 큰 뜻을 품은 동지들이 모여, 새와 짐승을 벗 삼아 스스로 밭 갈고 나무하는 농사꾼이 되어 ‘도원결의(桃園結義)’의 굳은 맹세를 방불케 하였다.”

열악한 조건에도 결의에 찬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그러나 교통이 불편하고 물자가 부족하여, 병사들은 영양실조와 각종 질병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결국 1919년 3·1운동 후 한족회의 지시로 문을 닫았으며, 대원들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편입되었다. 백서농장은 비록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4년에 걸친 고난은 이후 펼쳐질 독립전쟁의 큰 밑거름이 되었다.

백서농장을 이끌었던 최고 지도자, 즉 장주(庄主)는 김동삼(金東三·1878~1937, 안동)이다. 그의 이름이 독립운동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1907년(만 29세)이다. 이 해에 김동삼은 류인식·김후병·하중환 등과 함께 내앞마을에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더불어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新民會)와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 뒤 1910년 대한제국이 무너지자 그는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가 만주로 간 시점은 협동학교 제1회 졸업식을 마친 1911년 3월 이후로 추정된다. 그 뒤 1931년 체포될 때까지 20년간 오롯이 만주에서 활약했던 그의 이름 앞에는 ‘만주벌 호랑이’, ‘통합의 화신’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20년 동안 만주지역 곳곳을 누비며 독립운동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 힘썼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 이강훈은 “만주 한인사회에서 이념이나 지역적인 차이로 비난받지 않은 지도자가 드문데, 김동삼은 어느 쪽으로부터도 비난받지 않는 큰 인물이었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안동 오미마을 출신 김응섭도 ‘77년 회고록’에서 “지방색을 이용하여 자신의 기반을 구축하려는 정치운동가가 적지 않았는데, 김동삼같이 공평무사한 사람도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그가 ‘통합의 화신’으로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국 광복이라는 시대 과제’ 앞에 서 그에겐 이념과 지역의 차이는 중요치 않았다. 보다 큰 목표와 이상을 위해 모두를 아우르고자 했던 그의 실천의 자취는 우리가 깊게 되새겨야 할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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